[현대사 한바퀴] 제18화 앞장서 걸어간 사람들 4 -최초의 군함 양무호 함장 신순성
[현대사 한바퀴] 제18화 앞장서 걸어간 사람들 4 -최초의 군함 양무호 함장 신순성
  • 인천일보
  • 승인 2020.11.25 17:18
  • 수정 2020.11.25 16:44
  • 2020.11.26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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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함장 신순성, 역사 거센 물결 맞서다

 

대한제국 시대 최초의 군함 양무호
신순성, 동경상선학교 유학 우등 졸업
고종황제 항해술 인정 함장으로 낙점
구입 원금 상환·비용 탓 헐값에 되팔려

새 함정 광제호 고작 3인치 포 3문 설치
인천항서 등대 순시선·해관 감시선으로
신순성 근무 … 정확한 직함 기록 안 남아

광제호 태극기 경술국치 전날 자택 보관
손자 신용석이 인천개항박물관에 기증
신순성 '2012년 해기사 명예의 전당' 헌정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 군함의 함장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대답의 목소리는 더욱 줄어들지 모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군함은 근대 우리나라 최초의 군사용 목적의 선박을 의미한다.

현재 50세 이상 향토인은 구한국 시절―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한제국 시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軍艦)을 모항(母港)인 인천 바다에서 보았을 것이다. 태극기를 휘날리고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웅장한 고동을 불고 점잖게 바다 위를 떠다니던 쇠배[鐵船] 양무호(揚武號)호와 광제호(光霽號)가 바로 그것이다. '광제호'는 30년 전까지도 인천 축항 안에 새하얀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 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와 광제호 부함장(副艦長)으로 활약하던 분이 인천 해운사상 영원히 빛날 것이고 한국 해군에 있어 현대사(現代史)의 첫 페이지를 꾸밀 향토인 신순성 씨인 것을 아는 사람이 아직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유감이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국 해군사(海軍史)에 있어 “첫 페이지”를 꾸밀 신순성(愼順晟, 1878∼1944) 함장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직도 그리 많지 않음”을 탄식하고 있다. 참고로 이 글이 실린 『인천석금』은 1955년에 출판되었으니 글 중의 시대나 연도는 그 시점을 감안해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신순성 선생이 양무·광제호 두 배의 부함장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게다가 부함장이란 직책도 틀린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은 양무호이며 신순성 선생이 함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903년 9월의 일이다.

알려진 대로 양무호는 당시 어수룩하고 세상물정 모르던 우리 정부가 일본 미쓰이물산회사(三井物産會社)에 속아 산 선박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15년 전에 고물(古物)이 되어 세워두었던 배를 협잡으로 거금 55만 엔(당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10만 원)에 구입해 들여왔다 하여 이런저런 '풍설'이 항간에도 돌던 배였다. 아무튼 노후한 석탄 운반선 승립환(勝立丸)이 수리를 거쳐 군함 양무호로 변신해 그해 8월 12일 인천항에서 우리나라에 인계되는 것이다.

▲ 신순성 함장이 받은 도쿄고등상선학교 졸업 시 우등상장이다. 1901년 12월2일 ‘한국 유학생 신순성, 학술 우등, 품행 방정으로 일등 상품을 수여한다.’는 내용이다. /사진출처=김재승 저 『한국근대해운의 개척자 신순성 선장』 2005





 

 

 

군함 양무호 함장은 일본 유학생으로 졸업한 신순성 씨가 피임(被任)되얏난대 해함(該艦)에 사역(使役)은 수부, 화부 등 73명을 일작(日昨) 인항(仁港)에셔 모집하얏다더라

「모집선부(募集船夫)」라는 제하의 1903년 9월 8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내용이다. 이로써 73명의 선원을 인천항에서 선발하여 신순성 함장이 이끄는 우리나라 근대 해군 첫 함선인 양무호가 탄생하는 것이다.

▲ 신 함장의 장자 신태범 박사와 태극기. 이 태극기는 신 함장이 한일합병 전날인 1910년 8월28일, 광제호에서 내려 집에 보관했던 것을 장자 신 박사가 다시 보관하다가 손자 신용석씨 대에 이르러 인천시 중구 개항박물관에 기증한 뜻깊은 유물이다./사진출처= 오종원 외, 『간추린 인천사』 1999년
▲ 신 함장의 장자 신태범 박사와 태극기. 이 태극기는 신 함장이 한일합병 전날인 1910년 8월28일, 광제호에서 내려 집에 보관했던 것을 장자 신 박사가 다시 보관하다가 손자 신용석씨 대에 이르러 인천시 중구 개항박물관에 기증한 뜻깊은 유물이다./사진출처= 오종원 외, 『간추린 인천사』 1999년

신순성 함장은 동경상선학교 행해술학과를 우등으로 졸업, 당시 고가의 귀물(貴物)인 금제(金製) 연필, 시계 등을 부상으로 받는다. 고종황제가 신순성 함장을 낙점한 것은 이 같은 그의 우등한 항해술 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 1902년 1월 7일자 황성신문 기사이다. 한 달 넘은 늦은 기사이나 신순성 함장이 학술 우등으로 금제(金製) 연필과 시계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일등상 부상이었던 듯하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02년 1월 7일자 황성신문 기사이다. 한 달 넘은 늦은 기사이나 신순성 함장이 학술 우등으로 금제(金製) 연필과 시계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일등상 부상이었던 듯하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양무호는 이후 구입 원금 상환과 유지비용 때문에 정부 예산을 압박할 정도가 되면서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결국 1909년 11월, 구입 6년 만에 함선으로서 동, 서, 남해 어느 바다 물결 한 번 힘차게 헤쳐본 적도 없이, 애초 가격의 5%도 안 되는 헐값 4만2000원에 일본의 하라다상회(原田商會)에 되 팔린다.

신순성 함장이 양무호에서 언제 하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04년 2월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일해전 당시에는 이미 김성진(金聲振)으로 직이 바뀌어 있다.

▲ 우리나라 두 번째 기선 광제호(廣濟號). 군함의 역할은 하지 못한 채, 등대 순시선, 해관 감시선으로 사용된 배이다. 신순성 함장이 경술국치 전날 이 배에 게양되었던 태극기를 일본인 몰래 숨겨 두었던 일화가 전한다.(아래쪽 ) /사진 출처=인천정명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양무호 구입 이듬해인 1904년 11월, 정부가 일본에 발주한 새 함정 광제호(廣濟號)가 인천항에 도착한다. 이 배는 인천항에서 고작 3인치 포 3문을 설치하고는 등대 순시와 해관 감시선이 되고 만다.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있던 일본이 호락호락 한국 해군의 창설과 군함에 대해 조용히 눈감고 있을 리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배는 당시 해관 총세무사 영국인 백탁안(柏卓安, J. McLeavy Brown)이 선주(船主)로서 건조를 주동했을 뿐만 아니라, 비용도 모두 백탁안의 수중에서 놀던 해관 수입금이었다. 특히 당시는 영일동맹(英日同盟)으로 두 나라가 우호 관계에 있었던 까닭인지, 광제호가 인천에 인도되기 며칠 전인 1904년 11월 9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이 배의 신임 선장이 영국인 로사후드라는 기사가 실리는 것이다.

신순성 함장과 광제호의 관련 기록은 1908년 11월 3일 대한매일신보에 처음 보인다. 인천영화학교에 의연금을 낸 38명의 광제호 선원 명단이 「광제호 제원(光濟號諸員)」이라는 제목으로 실리는데, 여기 명단에 나오는 것이다. 신 함장의 성명은 별도의 난에 기재되어 있으며, 금액도 평 선원 37명 전원이 50전씩인 데에 비해 5원으로 크게 차이가 난다. 이것을 보면 고급 사관(士官)이 분명한데 안타깝게도 정확한 직함이 나와 있지 않다.

▲ 신순성(愼順晟) 함장. 한성외국어학교 일어과를 이수한 뒤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고등상선학교(東京高等商船學校)에서 갑종(甲種) 항해사(航海士) 자격을 따내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해 항해술사가 되었다. 그의 장남이 과거 인천의 원로 의사, 수필가, 향토사가로 유명했던 신태범(愼兌範) 박사이고, 장손(長孫)이 전 인권재단 이사장과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신용석(愼鏞碩) 씨다. /사진 출처 =인천정명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이후의 신 함장 관련 자료로는 1914년부터 1924년까지의 '직원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14년도에는 '조선총독부 체신국 기선 광제환(光濟丸) 2등 운전사 촉탁'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부르던 선명 '광제호'는 어느덧 일본식 '광제환'이 되어 있다. 운전사는 행해사의 당시 호칭이다.

이어 2년 뒤인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3등 운전사 촉탁으로. 그리고 1919년부터는 광제환 '촉탁'으로, 다시 1920년부터 1924년까지는 광제환 촉탁, 혹은 인천해원양성소(仁川海員養成所) 촉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1924년 광제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신 함장은 광제호에 게양했던 태극기를 경술국치 전날인 1910년 8월 28일 내려 일제가 모르게 자택에 고이 숨겨 두었는데, 타계 후 장자(長子) 신태범 박사가 보관하다가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27일 기선 '부산호'의 취항식장에 이 기를 들고 나가 광제호 깃발임을 밝히고 게양을 요청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그 후 손자 신용석이 이 태극기를 보관하다가 근래 인천개항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일반에게 전시되고 있다. 이밖에 광제호에서 사용하던 45밀리 함포 연습탄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사실도 알려져 있다.

만시지탄이나 선각 신순성 함장은 2012년 '해기사(海技士)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항해사였다는 사실만을 살핀 것인데, 당시 관제로는 함장의 신분이 무관이 아니고 문관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최초의 군함 양무호 함장이었던 사실 그대로 해군으로서 기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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