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너머의 영화들] 30) 폴커 슐렌도르프(Volker Schlondorff) '양철북'
[시간 너머의 영화들] 30) 폴커 슐렌도르프(Volker Schlondorff) '양철북'
  • 시희
  • 승인 2021.03.01 18:21
  • 수정 2021.03.01 18:22
  • 2021.03.02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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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대중들이 내지르는 '파괴의 파동'

 

▲ 영화 '양철북' 중 히틀러를 환영하러 나온 단치히 시민들의 모습.

“우린 새 시대에 살고 있어. 방관자는 있을 수 없어.”

나치 집회에 참가하려고 바삐 나치 군복을 차려입은 독일인 마체라트는 아내의 사촌 얀에게 충고한다. 카슈바이인 얀이 폴란드 국적을 선택한 건 미친 짓이라고 나무라면서 말이다. 1930년대 말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공존하는 자유도시 단치히에도 나치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평화롭던 도시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영화 '양철북'(1979)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독일 거장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대표작으로 당시 많은 화제를 뿌리며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특히 성장을 거부한 기이한 소년 오스카 역을 맡은 배우 데이빗 베넨트의 실제 나이에 맞지 않는 놀라운 연기는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영화는 독일과 폴란드의 접경지역 단치히 도시를 배경으로 주인공 오스카의 조부모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3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나치의 부상과 몰락으로 점철된 20세기 전반 독일 역사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그려내었다.

 

가족사에 투영한 사회체계의 변천과 파시즘의 흥망과의 관계

1899년 독일과 폴란드 접경 카슈바이의 드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감자밭에서 열심히 감자를 캐던 여인은 잠시 모닥불 앞에 앉아 뜨겁게 구운 감자를 먹는다. 이때 경찰들에게 쫓기던 방화범이 여인 앞에 엎드려 도움을 요청하고, 여인이 자신의 네 겹 치마를 한껏 펼쳐 그 속에 그를 숨겨주면서 3대에 걸친 가족사가 시작된다. 영화는 할머니, 엄마, 오스카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사회체계의 변천과 파시즘의 흥망과의 관계를 조명한다. 즉, 할머니의 네 겹 치마처럼 모든 걸 포용하는 가모장제를 대변하는 조부모 세대에서 부모 세대로 오면 독일인 마체라트를 중심으로 구성된 권위적, 억압적, 차별적인 가부장제로 전환된다. 이와 맞물려 평화롭던 도시는 파시즘이 스멀스멀 움트기 시작하고 급기야 나치 깃발이 온 도시를 점령한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태어난 오스카는 세 살 생일 때 어른들의 세계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지하실 층계에서 뛰어내려 성장을 멈춘다. 미성숙의 육체와 성숙한 정신의 소유자인 오스카는 신물 나는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휩쓸리지 않고 언제까지나 양철북을 두드리며 자유를 만끽하는 영원한 방관자로 남길 원한다. 때때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면 파괴의 비명소리로 유리를 깨부수면서 말이다. 오스카의 비명소리의 파동이 유리를 파괴하는 괴력을 발휘하듯, 가부장제의 억압구조하에서 뒤틀린 사람들이 내지르는 파동은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분출한다. “파시즘은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의 표현”이라고 지적한 빌헬름 라이히의 말대로 나치를 잉태하고 성장시킨 것은 바로 독일 대중들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대중들에 의해 비정상인으로 취급되는 방관자 오스카의 눈을 통해 소시민들의 일상생활 속에 잠재된 파시즘의 씨앗을 드러내 보인다. 독일 대중들이 일으킨 파괴의 파동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나치 독일의 패망과 더불어 자기파멸로 치닫는다. 추정상의 아버지인 얀과 마체라트를 죽음으로 내몬 오스카는 이제 무덤 앞에 서서 고민한다.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드넓은 들판, 할머니는 다시 감자를 캔다. 그리곤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닥불 앞에 앉아 네 겹 치마를 한껏 펼친다. 상처 입은 세상을 감싸 안 듯이…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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