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13. 취석실(醉石室) 우하영(禹夏永, 1741-1812)-(3) <천일록>, 내 일념은 동포를 모두 구제하는 데 있다
[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13. 취석실(醉石室) 우하영(禹夏永, 1741-1812)-(3) <천일록>, 내 일념은 동포를 모두 구제하는 데 있다
  • 간호윤
  • 승인 2021.03.08 19:29
  • 수정 2021.03.08 19:32
  • 2021.03.09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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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사유로 국가 대개혁 시무책을 마련하다
▲ 취석실(醉石室) 인장. (김내혜 전각작가의 '18세기 실학자 인장전'에서)
▲ 취석실(醉石室) 인장. (김내혜 전각작가의 '18세기 실학자 인장전'에서)
▲ 우하영(禹夏永) 인장. (김내혜 전각작가의 '18세기 실학자 인장전'에서)
▲ 우하영(禹夏永) 인장. (김내혜 전각작가의 '18세기 실학자 인장전'에서)

늘 세상은 완장(腕章) 찬 이들의 것이다.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하라고 완장을 채워줬건만 백성들에게 완장질만 해댄다. 저 시절, 선생은 당시 선비란 완장을 차고 무위도식하는 이들을 호되게 나무란다.

“사회 밑바닥으로부터 첫째가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선비입네' 하고 집안의 소득을 포기한다면 위로는 노부모가 있어도 콩만 먹고 물을 들이켜는 식의 변변찮은 끼니도 이을 수 없고 아래로는 처자식이 있어도 그 울부짖음을 구원할 수조차 없다. 하릴없이 세상을 업신여기고 허송세월만 한다면 이는 진정한 사람 도리가 아니니 어찌 선비라고 칭할 수조차 있단 말인가.”

선생은 유학을 통한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하였고 구체적으로 현실의 폐단을 바로잡아 하·은·주 삼대라는 이상적인 국가는 못 되더라도 현재보다는 나은 '소강조선(小康朝鮮, 조금 안정된 세상. 요순(堯舜)시대를 가장 태평한 시대라는 뜻에서 대동시대(大同時代)라고 하고, 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주공(周公)의 시대를 대동 시대보다는 못해도 그런대로 조금 다스려진 세상이라 하여 소강 시대라고 한다.'(<예기> '예운(禮運)'에 나온다)을 꿈꾸었다. 선생이 보기에 소강조선의 바탕은 <소학>이요, 이를 위해서는 유교로 백성을 가르치는 '이유교민'(以儒敎民) 정책이 필요했다. 선생이 지은 <시무책>은 그러한 생각의 결정체다. 1796년, 정조의 구언(求言)에 선생은 그중 시급한 시무(時務)에 관한 것만 골라 책자로 만들어 상소했다. 선생이 밝힌 상소 동기부터 본다.

“평소에 모아 기록해둔 것이 있는데 끝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대략 깎고 간추려서 책자를 만들어 분에 넘게 응지하는 구(具)로서 바치오니 성명(聖明, 정조)께서는 깊이 살피옵소서.”

선생은 평생 시골 유생으로만 지낸 학자였기에 사람들과 거의 사귀지 않았다. 대신 천성적으로 혼자 산수 유람하기를 좋아해 전국에 선생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여행을 통해 선생은 “우리나라의 산천·풍토·민요 등을 알지 못한다면 우물 안에서 벽을 보는 것과 같다”면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우리나라 풍토를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선생이 산천을 유람하며 보고 들은 체험, 옛 문헌과 당대 제가들의 논설을 널리 읽고 수집하여 국가·사회 경영 및 개혁 방안을 종합한 것이 바로 <천일록>(千一錄)이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지리·토지제도·군제·국방·관제·농업 기술 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선생의 사유가 나라 전체에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총체적 사유 방식은 18세기 조선 실학자들의 공통된 모습이다.

정조는 이 <시무책>을 보고는 “네가 올린 13조는 모두 백성과 나라 실용에 관한 게로구나(爾所陣十有三條 皆關民國之實用).”라며 비답(批答, 신하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을 내렸다. 그 뒤 1804년(순조 4) 인정전(仁政殿)에 화재가 발생한 뒤 순조가 구언을 하자 상소하면서, 또 이것을 <천일록>이라 이름 붙였다.

선생은 후일 정조에게 올린 '시무책'과 순조에게 올린 '천일록'을 말년에 모아 엮으면서 자서(自敍)를 붙여 <천일록>이라고 하였다. 천일록이란 “천 번 생각하여 혹 한 가지는 얻지 않을까(千慮之或有一得).”하는 말이다. 차례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책

제1책은 '건도'·'치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도'(建都)에서는 삼국 이래로 도읍의 건립 내력, 산천·풍속·농업·생리 등 인문지리적 상황에 대해 논하였다.

나라의 시초는 단군과 기자 조선이었다. 한양을 대일통 기운이 있는 가장 좋은 땅(首善之地)이라 하는 경기 지방 중심의 지역주의적 사고였다. 삼국통일에 대해서는 신라는 인(仁)과 문(文), 고구려는 무(武)를 숭상하였으나 백제는 가장 비옥한 땅에 살면서도 사치스러워 역사가 짧았다고 하였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를 자칭 소중화(小中華, 작은 중국)라 하는 이유를 지리적 구조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조선을 소중화라 지칭하는 이유는 대개 예악 법도와 의관문물을 중국 제도에서 들여오고 준수하였기 때문이지만, 선생은 아예 이를 부정한다. 선생은 “우리나라를 소중화라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의 예악문물을 본받고자 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산천과 풍속, 그 자체가 중국과 유사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가끔은 선생처럼 진실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진실은 거기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조선을 소중화라 부르는 이유를 “우리나라의 산천과 풍속, 그 자체가 중국과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는 “중국 산천은 모두 곤륜산에서 시작하고 우리나라 산천은 백두산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또 “중국 서북 지방이 무를 숭상하고 우리나라 관서 지방인 평안도에서 장수를 많이 배출하는 게 같고, 중국 동남 지방이 문을 숭상하는 게 우리나라 동남 지방인 안동 지방에서 재상을 많이 배출한 것과 같다”는 등을 열거하며 중국과 대등한 소중화론을 펼친다. 선생은 이 외에도 중국 기북 지방과 우리나라 평안도의 좋은 말, 중국 절동과 우리나라 호남 지방의 벼농사, 중국 노 지방을 도서(圖書) 고을이라 하는 것과 우리나라 경상도를 현송(絃誦, 예악과 학문을 익힘) 고을이라 부르는 것, 또 중국의 대 지방과 우리나라 충청도 지방에서 모시를 생산하는 것이 같다고 예를 들었다. 지금도 우리는 미국에게 썩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외세를 끌어들인 통일신라 이후, 당나라에 기댄 의존증이 송, 원, 명, 청으로 이어져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저 시절, 멸망한 명나라를 섬겨 자칭 소중화라 자칭해야 마음이 평온한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지리와 문화가 비슷하기에 우리가 소중화'라 하는 말이 한편으로는 궁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강조선을 꿈꾼 선생의 의기를 표현한 말이기에 꽤 호기스럽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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