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2회초 - 리그를 지배한 에이스들

▲우완선발 '에이스의 품격' 정민태
동산고 출신…1998년 첫 우승 주역
1999년 '20세기 최후 20승 투수'에
마운드 아래선 막대한 중압감 감내

▲좌완선발 '대한민국 에이스' 김광현
데뷔 이듬해 MVP…국가대표 활약
연고 선수 최초 메이저리그 진출도
인천과 동고동락 '현재진행형 전설'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에서 '인천' 두 글자를 빼더라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만한 라인업이다.

 인천 야구의 대명사처럼 굳어진 '짠물 야구'는 마운드에서 버틴 투수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리그를 지배한 에이스들의 활약은 굴곡진 세월을 지나 영광의 세월도 누리게 만들었다. 인천 프로야구는 1998년을 시작으로 10년 주기로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바로 그때 정민태(52)와 김광현(34)이 있었다.

 

우완선발-'20세기 마지막 20승' 정민태

2003년 10월25일 한국시리즈 7차전 마운드에 정민태가 올랐다.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 때처럼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달라진 건 경기장 분위기였다. 정민태가 공을 던질 때마다 관중석에선 환호가 아닌 탄식이 터져 나왔다. 현대 유니콘스가 수원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였다.

'인천 SK'를 앞세웠던 SK 와이번스의 행진도 거기서 끝났다. 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7차전 완봉승이었다. 1차전과 4차전에 이어 3승을 따낸 정민태는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1998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1998년 우승 배터리였다가 5년 만에 정민태를 적으로 마주했던 박경완은 “다양한 구질에 공이 빨랐고, 제구력도 좋았다. 역대 우완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투수”라고 말했다.

정민태가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우완선발 부문 주인공으로 뽑혔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정민태는 26표를 얻어 프로야구 초창기 불멸의 기록을 남긴 장명부(12표)를 제쳤다.

“인천을 대표하는 우완투수”라는 투표인단 선정 이유처럼 구도의 부활은 정민태의 전성기와 함께 시작했다. 고교야구가 침체기였던 1980년대 중반에는 황금사자기 4강, 전국체전 준우승을 이끌며 동산고 야구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동산고 감독이었던 김학용은 “공에 힘이 있었고, 사인 내면 그대로 던질 만큼 제구도 좋았다”고 떠올렸다.

▲ 1992년 3월14일 태평양 돌핀스 입단 직후 신인 시절 정민태(왼쪽)와 잠수함 에이스로 활약했던 박정현.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2년 3월14일 태평양 돌핀스 입단 직후 신인 시절 정민태(왼쪽)와 잠수함 에이스로 활약했던 박정현.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10월30일 인천 연고팀 사상 첫 우승을 확정 지은 뒤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정민태.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10월30일 인천 연고팀 사상 첫 우승을 확정 지은 뒤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정민태.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4년 부상을 딛고 태평양 돌핀스 주축 투수로 떠오른 정민태. /사진제공=태평양 돌핀스 1994년 팬북
▲ 1994년 부상을 딛고 태평양 돌핀스 주축 투수로 떠오른 정민태. /사진제공=태평양 돌핀스 1994년 팬북

국가대표 에이스로 성장한 정민태는 1992년 고향팀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지만,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재활 끝에 정민태가 진면목을 보인 건 1994년이었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5이닝을 무안타로 틀어막은 정민태는 인천구장을 가득 메우고도 준우승에 아쉬워한 팬들에게 위안거리였다.

정민태는 1996년 15승, 평균자책점 2.44를 기록하며 리그를 지배한 에이스로 거듭났다. 정민태는 그해부터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을 떠나기 직전 시즌인 1999년까지 해마다 200이닝을 넘게 던졌고, 4년간 65승을 거뒀다. 1999년에는 '20승 투수' 반열에 올랐다.

통산 124승, 골든글러브 3회 수상 기록을 남긴 정민태는 위풍당당했던 풍모와 달리 마운드 아래에선 에이스의 중압감을 짊어진 투수이기도 했다. 박경완은 “등판하는 날이면 물만 마셔도 게워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부터 프로 무대까지 인천 마운드 기둥이었던 정민태는 2008년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식은 이듬해 8월 목동구장에서 열렸다. 2000년 현대 유니콘스 연고지 이전으로 떠나보낸 그를 인천 야구팬들은 다시 마주하지 못했다. SSG 랜더스 코치 이대진은 “동시대에 활동했는데 구위와 성적이 월등했다. 정말 좋은 공을 가진 선수였다”고 말했다.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연재 이후, 우완선발 부문 후보에서 채병용 SSG 랜더스 2군 투수코치가 누락된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원클럽맨’으로 활약하며 통산 1336이닝, 84승, 22세이브, 29홀드 기록을 남긴 채병용 코치는 2008년 승률왕을 차지해 후보 선정 기준을 충족했으나, 수상 실적과 기록 집계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습니다. 채병용 코치와 SSG 랜더스 구단,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좌완선발-'대한민국 에이스' 김광현

2007년 10월26일 한국시리즈 4차전 마운드에 김광현이 올랐다. 소년티가 남아 있던 그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번졌다. 누군가는 긴장으로, 누군가는 배짱으로 해석했을 미소였다. 한국시리즈 전적은 1승 2패로 SK 와이번스가 밀린 상황에서 상대 두산 베어스 선발은 다니엘 리오스. 그해 22승을 올렸고,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완봉승을 거둔 투수였다.

시즌 3승에 그쳤던 만 19세 투수는 150㎞가 넘는 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상대 타선을 5회까지 노히트노런으로 막았다. 8회 원아웃까지 잡아내는 동안 피안타는 1개뿐이었고, 탈삼진 9개를 곁들였다. 한국시리즈 신인 최다 탈삼진 신기록이었다. 포수 마스크를 썼던 박경완은 “지금까지 받아봤던 김광현 공 가운데 베스트였다. 종속이 빨라서 공을 잡을 때 묵직함이 느껴졌고, 슬라이더를 던지면 방망이가 닿지 못할 만큼 꺾여 나갔다”고 떠올렸다. 감독 김성근은 당시 “SK에 큰 투수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에이스의 출현을 모두가 직감한 순간이었다.

▲ 메이저리그에서 올시즌 국내 무대로 복귀한 김광현이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역투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 메이저리그에서 올시즌 국내 무대로 복귀한 김광현이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역투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 메이저리그에서 올시즌 국내 무대로 복귀한 김광현이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역투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 메이저리그에서 올시즌 국내 무대로 복귀한 김광현이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역투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김광현이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좌완선발 부문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인천 야구인 40명 가운데 37명이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대표하는 좌완투수로 김광현을 택했다. “대한민국 에이스”, “비교 불가”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데뷔 이듬해인 2008년 김광현은 KBO 리그 MVP, 다승왕, 탈삼진왕을 석권했다. 2009년 평균자책점과 승률 1위를 차지했고, 2010년에도 다승왕에 올랐다. 스무살을 갓 넘긴 나이에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일본 킬러'로 등극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SK 와이번스 에이스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 4회 우승을 이끈 김광현.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SK 와이번스 에이스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 4회 우승을 이끈 김광현.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인천 야구가 에이스라는 칭호와 김광현을 동일시하는 건 승승장구했던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김광현은 2011년부터 어깨 부상에 시달리며 3년간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다시 10승 투수로 복귀했다. 2016년 시즌을 마치고 팔꿈치 수술로 재활을 거친 뒤에도, 다시 2점대 평균자책점과 함께 돌아왔다. 2018년 한국시리즈에선 150㎞ 중반에 이르는 강속구로 명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광현은 2020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인천 연고팀 선수로는 처음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시즌 단축과 부상 여파에도 2년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10승을 올렸다. 올해 SSG 랜더스 유니폼을 입고 국내 무대로 돌아온 그는 한층 노련해진 투구로 평균자책점 1위를 달리고 있다. 스무살의 나이에 리그를 들썩였을 때도, 산전수전을 겪고 리그를 호령하는 지금도 인천은 그를 '에이스'라고 부른다. SSG 랜더스 코치 조동화는 “현재진행형 대한민국 레전드 좌완”이라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인단 (가나다순)

20대(5명) - 김교람(SSG 내야수), 김정우(SSG 투수), 김택형(SSG 투수), 이정범(SSG 외야수), 하성진(SSG 내야수)

30대(10명) - 김성현(SSG 내야수), 김태훈(SSG 투수), 문승원(SSG 투수), 박민호(SSG 투수), 서진용(SSG 투수), 오준혁(SSG 외야수), 이현석(SSG 포수), 이흥련(SSG 포수), 정정호(서화초 감독), 하재훈(SSG 외야수)

40대(10명) - 고효준(SSG 투수), 김영수(인하대 코치), 손지환(SSG 코치), 송순석(동인천중 감독), 엄정욱(엄정욱베이스볼아카데미 감독), 이대진(SSG 코치), 이양기(동산고 감독), 정경배(SSG 코치), 정상호(SSG 코치), 조동화(SSG 코치)

50대(10명) - 강필선(제물포고 감독), 계기범(인천고 감독), 김원형(SSG 감독), 김정준(SSG 데이터센터장), 김홍집(부평구리틀야구단 감독), 류선규(SSG 단장), 장광호(덕적고 감독), 전형도(SSG 코치), 정원배(인하대 감독), 조원우(SSG 코치)

60대 이상(5명) - 김시진(KBO 경기운영위원), 김재현(전 동산고 코치), 김학용(전 동산고 감독), 양후승(전 인천고 감독), 임호균(한국독립야구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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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외야수-박재홍·김강민'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등장한 '괴물 신인' 박재홍(49)은 인천 연고팀은 물론, 프로야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 첫해 신인으로 지명한 김강민(40)은 공수주에서 꾸준한 기량을 과시하며 프로야구 최장 '원클럽맨'이 됐다. 두 선수가 한솥밥을 먹었던 시절, SK 와이번스는 '왕조'로 불렸다. 인천 야구장을 주름잡은 '괴물'과 '짐승'의 출현은 프로야구 판도마저 뒤흔들었다. 외야수-'호타준족' 박재홍1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외야수-이진영' '지명타자-김기태' 2003년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친 SK 와이번스는 처음 '가을야구'를 경험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2연승한 SK 와이번스는 플레이오프에서 기아 타이거즈와 맞붙었다. 3차전 이진영(42)의 2점 홈런에 이어 김기태(53)의 적시타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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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기록' 장명부1985년 6월21일 인천구장은 4914명의 관중들로 채워졌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에 머문 삼미 슈퍼스타즈 고별 경기였다. 마운드에 오른 장명부는 1회부터 8실 [구도 인천] 돌핀스 돌풍의 주역…정명원·최창호·박정현·김동기 1989년 인천 연고팀이 처음 가을야구에 등장했다. 잠자고 있던 구도의 야성도 깨어났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구장)은 1만30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입장하지 못한 극성팬들이 철탑에 오르는 소동도 벌어졌다. 2000원짜리 입장권이 2만원에 팔린 암표는 기승을 부렸다.준플레이오프 3경기 선발투수는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차례로 나섰다.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해 태평양 돌핀스가 올린 62승 가운데 40승을 책임진 삼총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도 변함없이 마스크를 썼다. 돌풍은 멈출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만년 꼴찌, 한을 풀다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왕조의 탄생과 부활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응원가 '연안부두' 가사처럼 인천은 연고팀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마다 설레게 하는 야구는 계속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환희의 순간도 마주했다. 가을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됐다. 2000년 현대 연고지 이전2000년 3월16일 시범경기가 치러진 인천구장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원정팀이 안타를 치면 환호가 터졌고, 현대 유니콘스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날 신문에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신생 SK 야구단은 인천으로 연고지가 결정됐다는 기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