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2회말 - 연습생에서 기록 제조기로

인천야구 영광의 시대 이끈 '환상의 배터리'

▲구원투수 '인천의 허리' 조웅천
돌핀스~와이번스 '전천후 카드'
중간·마무리 오가며 헌신적 활약
13년 연속 50경기 출장 대기록도


▲포수 '불멸의 포도대장' 박경완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 포수 평가
인천 영광의 순간마다 안방 지켜
“전력의 반” 극찬…유일 영구결번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

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조웅천은 1995년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80과 3분의 2이닝을 던졌다. 1990년 1군 무대에 오른 이후 4년간 소화했던 70이닝보다도 많은 투구였다.

조웅천은 일반 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야구부 창단 2년째를 맞았던 순천상고로 전학 가며 야구선수 꿈을 놓지 않았다. 졸업한 뒤에는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1989년 태평양 돌핀스에 연습생(육성선수)으로 문을 두드렸다. 1995년 6월15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해 첫 승을 올리기까지 6년이 걸렸다. 잡초 같았던 야구 인생은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로 이어지며 소나무와 같은 존재가 됐다. 2008년까지 13년 연속 5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 SK 와이번스 초창기부터 2003년 구원왕을 차지하며 인천 마운드를 지킨 조웅천.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SK 와이번스 초창기부터 2003년 구원왕을 차지하며 인천 마운드를 지킨 조웅천.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조웅천 SSG 랜더스 투수코치가 올 초 전지훈련에서 투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 조웅천 SSG 랜더스 투수코치가 올 초 전지훈련에서 투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서 가장 치열했던 부문은 구원투수였다.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인 정명원(13표), SK 와이번스 벌떼 불펜의 '여왕벌' 정대현(9표), 최다 출장 기록 보유자인 정우람(4표)보다 많은 표를 얻은 선수는 구원투수 역사를 새로 쓴 조웅천(14표)이었다.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데뷔 때부터 인천에서 가장 오래, 많은 활약을 한 선수”라고 말했다.

현대 유니콘스에서 '현대판 마당쇠'로 불린 그는 1996년부터 '기록 제조기'로 명성을 쌓았다. 그해 조웅천은 전체 126경기 가운데 68경기에 등판했다.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장명부가 세운 60경기를 뛰어넘은 신기록이었다. 한국시리즈 2차전에선 연장전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인천 연고팀의 한국시리즈 첫 승리이자, 첫 번째 승리투수였다.

'필승조'로 자리매김한 조웅천은 2000년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 소속으로 초대 홀드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듬해부터 SK 와이번스에서 중간과 마무리를 전천후로 오갔다. 2003년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30세이브를 올려 구원왕도 차지했다.

그 이후 행보도 신기록의 연속이었다. 2005년 김용수(613경기)의 기록을 넘어서며 투수 최다 출장 신기록을 세웠다. 'KBO 1호' 통산 700경기 출장(2007년 4월), 800경기 출장(2008년 8월)도 조웅천의 몫이었다. SK 와이번스가 왕조로 군림한 2007년에도 평균자책점 1.57을 기록하며 2승 9세이브 16홀드로 활약했다. 200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813경기에서 마운드에 올랐다. 지금은 SSG 랜더스 코치로 투수진을 이끌고 있다. SSG 랜더스 단장 류선규는 “오랜 기간 안정감 있는 투구로 셋업맨과 마무리 역할을 잘 소화했다”고 말했다.

 


 

 

포수-'전력의 절반' 박경완

2009년 6월24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9회초 땅볼을 치고 나간 박경완은 쩔뚝이며 쓰러진 채 1루에 가까스로 손을 뻗었다. 진단 결과는 아킬레스건 파열. 이튿날 수술했던 의사는 “선수 생명은 끝났다”고 말했다. 박경완은 SK 와이번스가 끝내기 홈런을 맞고 우승을 놓친 그해 11월 오키나와로 재활을 떠났다. 일행은 트레이닝 코치뿐이었다. 석 달 동안 박경완은 걷기만 했다.

이듬해 개막전에서 타격 훈련도 건너뛴 박경완은 선발 포수로 출장해 첫 타석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팀도 3대 2로 승리를 거뒀다. 그는 “몸 상태보다도 직전 시즌부터 계속된 팀 19연승 기록이 깨질까봐 불안했다. 다행히 22연승까지 이어갔다”고 했다. 집도의는 “논문으로 쓸 만한 사례”라고 했지만, 정작 그가 써내려간 건 포수 최초 300홈런, 개인 통산 2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이었다.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마지막 스트라이크를 잡고 마운드로 달려오는 그를 향해 에이스 김광현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인천 연고팀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 현대 유니콘스 포수 박경완과 투수 정민태, 1루수 김경기가 환호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인천 연고팀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 현대 유니콘스 포수 박경완과 투수 정민태, 1루수 김경기가 환호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순간 모자를 벗고 인사한 투수 김광현을 향해 달려가는 포수 박경완.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순간 모자를 벗고 인사한 투수 김광현을 향해 달려가는 포수 박경완.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인천 야구인 40명 가운데 35명이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대표하는 포수로 박경완을 꼽았다. 초중고를 거쳐 프로까지 그와 배터리를 이뤘던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300홈런을 기록하며 인천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레전드 포수”라고 말했다.

인천 야구 영광의 순간마다 포수 마스크를 쓴 박경완이 있었다. 1998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투수왕국'의 포수는 박경완이었다. SK 와이번스가 '왕조'로 불리며 일궈낸 우승도 박경완의 손에서 비롯했다. 2007년과 2010년 마지막 공을 잡아낸 것도 그였고, 2008년 접전을 마무리한 더블플레이도 그의 송구로 완성됐다.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연습생(육성선수)으로 입단한 박경완은 1994년부터 주전 포수로 발돋움하며 4할이 넘는 도루저지율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1998년 시즌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인천 야구와 박경완 모두 전성기를 맞았다.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과 함께 박경완은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에서 MVP·홈런왕·골든글러브를 차지하고, 포수 최초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한 그는 2003년 인천으로 돌아왔다.

SK 와이번스에서 박경완은 감독 김성근 표현대로 “전력의 반”이었다. 그의 등번호 '26번'은 인천 프로야구 유일무이한 영구결번이 됐다. 박경완의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WAR)는 67.63(스탯티즈 기준)으로, 역대 포수 가운데 1위다. 허구연 KBO 총재는 지난해 저서 '그라운드는 패배를 모른다'에서 “박경완은 포수로서의 리드, 타자 대처 능력, 포구 능력, 센스 등에서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며 “공수 양면에서 그를 능가할 포수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포수 박경완] “숱한 우승·영구결번 뜻깊은 선물 받아”

“수비 가장 중요시…투수 성장 책임감"
“포수로 2000경기 못 채워 아쉬움 남아"
“도루 저지·타자와 수싸움 자부심 느껴”

1995년 무렵 어느 날 박경완은 차를 몰고 가다가 길을 잃었다. “고속도로에서 반대쪽으로 가는 바람에 인천 방향으로 접어들었는데, 포근한 느낌이 들었어요. 친구한테 '나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길이 좋아 보여'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나 박경완(사진)은 인천 연고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됐고,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영구결번 선수가 됐다. 지난달 14일 제물포고 야구부 훈련장에서 인스트럭터로 활동 중인 박경완을 만났다.

 

▲인천에서 유일한 영구결번이다.

-팀을 옮기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2006년 은퇴를 고민하기도 했고, 2009년 부상을 겪었지만 고된 훈련 끝에 성적을 냈기 때문에 야구가 재밌었다. 선수와 코치로 SK 와이번스에서 네 번 우승하면서 영구결번이라는 뜻깊은 선물도 받았다.

 

▲홈런왕 2회, 골든글러브 4회뿐 아니라 통산 포수 최다 홈런, 리그 최초 4연타석 홈런, 포수 최초 40홈런 등의 기록을 쌓았다.

-공격은 내세울 만한 기록이 없다고 생각한다. 제일 중요하게 여긴 건 수비다. 4타수 무안타였어도 팀이 이기고, 투수들이 승리·홀드·세이브를 챙겼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30대부터는 투수들이 성장하는 데 책임감을 느꼈고, 경기 출장에 의미를 가졌다.

 

▲통산 2043경기를 뛰었다.

-포수로 1990경기를 나섰다. 국내에선 포수 2000경기 출장 기록이 없었고,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물다. 10경기를 끝내 채우지 못했다. 지금도 10경기만 포수 마스크를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어떤 포수였다고 생각하는지.

-도루 저지도 자부심이 있었지만 블로킹을 우선시했다. 그래야 투수가 마음놓고 던질 수 있다. 자신감 있었던 건 수싸움이었다. 타자가 걸어오는 모습만 봐도 '초구 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 타자를 분석해서 구속·볼카운트 대응을 머리에 저장했다. 3연전 첫 타석에서 어떤 공을 쳤는지를 기억하면서 수싸움을 벌였다. 야구는 확률 싸움이다. 10번 붙어서 6번 이기면 된다.

 

/글·사진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인단 (가나다순)

20대(5명) - 김교람(SSG 내야수), 김정우(SSG 투수), 김택형(SSG 투수), 이정범(SSG 외야수), 하성진(SSG 내야수)

30대(10명) - 김성현(SSG 내야수), 김태훈(SSG 투수), 문승원(SSG 투수), 박민호(SSG 투수), 서진용(SSG 투수), 오준혁(SSG 외야수), 이현석(SSG 포수), 이흥련(SSG 포수), 정정호(서화초 감독), 하재훈(SSG 외야수)

40대(10명) - 고효준(SSG 투수), 김영수(인하대 코치), 손지환(SSG 코치), 송순석(동인천중 감독), 엄정욱(엄정욱베이스볼아카데미 감독), 이대진(SSG 코치), 이양기(동산고 감독), 정경배(SSG 코치), 정상호(SSG 코치), 조동화(SSG 코치)

50대(10명) - 강필선(제물포고 감독), 계기범(인천고 감독), 김원형(SSG 감독), 김정준(SSG 데이터센터장), 김홍집(부평구리틀야구단 감독), 류선규(SSG 단장), 장광호(덕적고 감독), 전형도(SSG 코치), 정원배(인하대 감독), 조원우(SSG 코치)

60대 이상(5명) - 김시진(KBO 경기운영위원), 김재현(전 동산고 코치), 김학용(전 동산고 감독), 양후승(전 인천고 감독), 임호균(한국독립야구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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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기록' 장명부1985년 6월21일 인천구장은 4914명의 관중들로 채워졌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에 머문 삼미 슈퍼스타즈 고별 경기였다. 마운드에 오른 장명부는 1회부터 8실 [구도 인천] 돌핀스 돌풍의 주역…정명원·최창호·박정현·김동기 1989년 인천 연고팀이 처음 가을야구에 등장했다. 잠자고 있던 구도의 야성도 깨어났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구장)은 1만30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입장하지 못한 극성팬들이 철탑에 오르는 소동도 벌어졌다. 2000원짜리 입장권이 2만원에 팔린 암표는 기승을 부렸다.준플레이오프 3경기 선발투수는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차례로 나섰다.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해 태평양 돌핀스가 올린 62승 가운데 40승을 책임진 삼총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도 변함없이 마스크를 썼다. 돌풍은 멈출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만년 꼴찌, 한을 풀다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왕조의 탄생과 부활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응원가 '연안부두' 가사처럼 인천은 연고팀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마다 설레게 하는 야구는 계속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환희의 순간도 마주했다. 가을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됐다. 2000년 현대 연고지 이전2000년 3월16일 시범경기가 치러진 인천구장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원정팀이 안타를 치면 환호가 터졌고, 현대 유니콘스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날 신문에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신생 SK 야구단은 인천으로 연고지가 결정됐다는 기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