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4회말 - '인천SK'의 좌타자들

인천야구에 서광 비추고 왕조 세웠다

▲외야수 '국민 우익수' 이진영
창단멤버 합류 2000년대 강팀 발돋움 일익
2006년 WBC 한일전 호수비 강렬한 인상
프로 통산 기록 절반가량 문학구장서 남겨


▲지명타자 '큰형님' 김기태
인하대 출신…2004년 팀 최초 골든글러브
타격능력·리더십 뛰어나 해결사·맏형 역할
2003년 주장 맡아 창단 첫 한국시리즈 견인

 

2003년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친 SK 와이번스는 처음 '가을야구'를 경험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2연승한 SK 와이번스는 플레이오프에서 기아 타이거즈와 맞붙었다. 3차전 이진영(42)의 2점 홈런에 이어 김기태(53)의 적시타가 터졌다. SK 와이번스를 신흥 명문 구단으로 도약시킨 좌타자들의 활약은 '인천 SK' 구호가 물결을 이룬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의 첫 번째 페이지를 열었다.

 

외야수-'국민 우익수' 이진영

▲ 2003년 10월12일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문학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SK 와이번스를 응원하고 있다. /인천일보DB
▲ 2003년 10월12일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문학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SK 와이번스를 응원하고 있다. /인천일보DB

2003년 10월19일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문학구장은 3만400석이 매진됐다. 처음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은 SK 와이번스 상대는 현대 유니콘스였다. 인천을 떠난 팀과 인천에 새로 둥지를 튼 팀이 우승을 놓고 인천에서 맞붙은 첫날,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했던 이진영의 타구가 관중석에 떨어졌다. 동점을 만드는 홈런이었다. 3차전 승자는 SK 와이번스였다.

▲ SK 와이번스 창단 멤버이자 '왕조' 시절 주축 타자로 활약한 이진영./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SK 와이번스 창단 멤버이자 '왕조' 시절 주축 타자로 활약한 이진영./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닷새 뒤 잠실구장에서 열린 6차전 3회말에도 이진영은 2점 홈런을 터뜨렸다. 경기는 2대 0으로 끝났다. 7차전까지 이어진 혈투 끝에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창단 멤버 이진영은 SK 와이번스가 2000년대 강팀으로 발돋움하는 초석을 놨다.

이진영이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외야수 부문 주인공이 됐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31명이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대표하는 외야수로 이진영을 꼽았다. SSG 랜더스 코치 전형도는 “인천 연고팀 경력이 길진 않았지만, 임팩트가 있었다”고 말했다.

▲ 이진영은 2002년부터 3년 연속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SK 와이번스 주전 외야수로 자리잡았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이진영은 2002년부터 3년 연속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SK 와이번스 주전 외야수로 자리잡았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이진영이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지 1년이 지난 2000년 프로야구판을 뒤흔드는 일이 벌어진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쌍방울 레이더스는 해체했고, SK 와이번스가 창단했다. '서울 입성'을 내걸며 떠난 현대 유니콘스 대신 SK 와이번스는 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다. 이진영은 문학구장에서 실력이 만개했다. 2003년 안타 158개(4위)를 치며 3할2푼8리(5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에도 3할4푼2리로 리그 타격 2위에 올랐다.

▲ 2003년 12월11일 SK 와이번스 이진영이 프로야구 골든포토상을 수상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3년 12월11일 SK 와이번스 이진영이 프로야구 골든포토상을 수상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정확한 타격과 강한 어깨로 입지를 굳힌 이진영은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국민 우익수'로 떠올랐다. SK 와이번스 타자 가운데 유일하게 태극마크를 단 이진영은 그해 3월5일 한일전에서 0대 2로 밀리던 4회말 2사 만루, 그림 같은 다이빙 캐치로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승부의 분수령이었다. 같은 달 16일 일본과 다시 맞붙은 경기에서도 레이저 송구로 홈에서 주자를 잡아냈다.

▲ 국가대표로 나선 2006년 WBC에서 연이은 호수비를 펼친 이진영에겐 '국민 우익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국가대표로 나선 2006년 WBC에서 연이은 호수비를 펼친 이진영에겐 '국민 우익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이진영은 SK 와이번스가 2007년부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동안에도 주축 타자로 활약했다. 3할대 고감도 타격도 여전했다. 2008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선 1루수로 나와 3대 2로 치열했던 9회말 1사 만루, 원바운드 송구를 잡아 살얼음판 승부를 끝내는 더블플레이를 이끌어냈다. 한국시리즈 판세를 기울게 한 결정적 수비였다.

이진영은 2009년부터 2018년까지 LG 트윈스, KT 위즈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통산 2160경기에서 2125개 안타를 쳤다.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013경기, 1015개 안타는 인천에 남긴 기록이다. 2020년에는 타격코치로 인천에 돌아왔다. SSG 랜더스 단장 류선규는 “국민 우익수로 인천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였다”고 말했다.

 


 

 

지명타자-'형님 리더십' 김기태

2003년 창단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SK 와이번스를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전년도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와의 준플레이오프부터 예측불허 승부가 펼쳐졌다. 그해 10월5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2차전은 3타수 3안타를 기록한 김기태 활약을 발판 삼아 SK 와이번스 승리로 끝났다.

▲ 2002년부터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하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김기태./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2년부터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하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김기태./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2년부터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하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김기태./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2년부터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하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김기태./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기아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SK 와이번스는 세 경기를 모두 쓸어 담았다. 주장 김기태는 한국시리즈 진출이 걸린 3차전 4회말 승부에 쐐기를 박는 적시타를 터뜨렸다. 2002년 올스타전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만원을 이룬 문학구장에는 '인천 SK' 구호가 적힌 수건이 물결을 이뤘다.

▲ 2003년 시즌 출정식에서 SK 와이번스 주장을 맡은 김기태(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선수단을 독려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3년 시즌 출정식에서 SK 와이번스 주장을 맡은 김기태(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선수단을 독려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서 지명타자 부문 주인공은 2003년 주장으로 SK 와이번스 돌풍에 앞장섰던 김기태(16표)가 선정됐다. 지명타자는 올스타 투표에서 가장 경합이 펼쳐진 포지션 중 하나였다. 특히 선수단을 이끈 주장들이 각축했다. 2000년대 SK 와이번스 중심타자로 활약하며 2011년 주장을 지낸 이호준(11표), SK 와이번스 왕조의 일등공신이자 은퇴 시즌이었던 2010년 주장으로 우승을 일군 김재현(9표),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해 현대 유니콘스의 '영원한 캡틴'으로 남은 이숭용(4표)이 고른 지지를 얻었다.

김기태는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인하대로 진학했다. 1989년 가을철대학야구연맹전에선 홈런포를 가동하며 준우승 주역이 됐고, 이듬해 백호기 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인하대를 결승으로 이끌었다. 1990년 세계야구선수권은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대회였다. 김기태는 대만과의 준결승리그, 푸에르토리코와의 3·4위전 경기에서 연달아 홈런을 터뜨렸다. 신생팀 특별지명을 통해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데뷔한 그는 프로에서도 힘과 정확성을 모두 갖춘 방망이를 선보였다.

김기태는 프로야구판을 술렁였던 대형 트레이드 주인공이기도 했다. 1998년 삼성 라이온즈는 선수 2명에 20억원을 얹어 김기태·김현욱을 영입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투타 주축 선수들을 보내고, 구단 운영비를 조달했다. 3년 뒤에는 무려 8명이 유니폼을 갈아입은 트레이드를 통해 SK 와이번스에 입단했다.

▲ 200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김기태는 주로 지명타자로 출장하며 2004년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김기태는 주로 지명타자로 출장하며 2004년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김기태는 2004년 타율 3할2푼을 기록하며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거머쥐었다. SK 와이번스가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한 건 그해 김기태와 이진영(외야수 부문)이 처음이었다. 2005년 시즌 뒤 은퇴한 김기태는 SK 와이번스 타격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LG 트윈스와 기아 타이거즈 감독을 거쳐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격코치를 맡고 있다. 김기태와 선수 생활을 함께했던 인하대 감독 정원배는 “타격 능력이 출중한 해결사였다”며 “팀을 하나로 모으는 리더십도 뛰어났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KBO 원년 올스타] 삼미 김재현, 인천팀 첫 투수 올스타…은퇴 후 모교 지도자로

1982년 시즌 47경기 소화·190이닝 투구 '철완'
“꼴찌팀에서도 한명은 뽑아야 하니 선발” 웃음
“동산고 코치 시절 류현진·송은범 등 배출 뿌듯”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 프로야구 원년 올스타전은 서울·부산·광주에서 3연전으로 치러졌다. 6개 구단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었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서군에 속했다.

팬 투표로 선정된 '베스트10' 명단에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는 없었다. 그래도 감독 추천으로 투수 김재현, 포수 금광옥, 3루수 조흥운, 유격수 송경섭, 중견수 양승관, 우익수 김경남 등 6명이 올스타로 이름을 올렸다.

투수로는 유일하게 원년 올스타전에 나섰던 김재현(63)은 은퇴 이후 모교인 동산고 코치를 지냈다. 야구계를 떠나 인천항에서 하역반장으로 일하는 그가 지난 6월2일 퇴근길에 인천일보를 찾았다.

 

▲청보 핀토스에서 은퇴한 뒤 어떻게 지냈는지.

-1988년부터 김학용 감독님 부름을 받고 동산고 투수코치를 했다. 처음 가르쳤던 투수가 위재영이다. 황금사자기·봉황기 우승도 이뤘다. 속초상고 감독을 맡았다가 1990년대 후반 동산고 투수코치로 돌아왔다. 그때 이현승·송은범·금민철·류현진을 만났다. 좋은 투수들을 배출해서 뿌듯했는데, 찾아오는 제자가 한 명도 없다.(웃음)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 멤버로 합류했는데.

-실업야구 선수 생활을 했고, 육군 경리단에서 전역할 무렵에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개막 직전 팀에 들어가보니 경기를 뛸 만한 투수가 거의 없었다.

 

▲원년 80경기 시즌이었는데 47경기에 등판했고, 무려 190이닝 넘게 투구했다.

-팀에서 가장 많이 던졌다. 하루 걸러 마운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6승 19패로 원년 최다 패 투수였다. 올스타전에 나가긴 했는데, 꼴찌팀에서도 한 명은 넣어줘야 하니까 선발됐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웃음)

 

▲1군 경력은 1986년이 마지막이다. 짧았던 프로 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허리 부상 때문에 뛸 수가 없었다. 교통사고가 나서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일들이 떠올라서 요즘 프로야구를 잘 안 보는데, 그래도 평생 잊히지 않을 추억들이 남았다.

 

/글·사진 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인단 (가나다순)

20대(5명) - 김교람(SSG 내야수), 김정우(SSG 투수), 김택형(SSG 투수), 이정범(SSG 외야수), 하성진(SSG 내야수)

30대(10명) - 김성현(SSG 내야수), 김태훈(SSG 투수), 문승원(SSG 투수), 박민호(SSG 투수), 서진용(SSG 투수), 오준혁(SSG 외야수), 이현석(SSG 포수), 이흥련(SSG 포수), 정정호(서화초 감독), 하재훈(SSG 외야수)

40대(10명) - 고효준(SSG 투수), 김영수(인하대 코치), 손지환(SSG 코치), 송순석(동인천중 감독), 엄정욱(엄정욱베이스볼아카데미 감독), 이대진(SSG 코치), 이양기(동산고 감독), 정경배(SSG 코치), 정상호(SSG 코치), 조동화(SSG 코치)

50대(10명) - 강필선(제물포고 감독), 계기범(인천고 감독), 김원형(SSG 감독), 김정준(SSG 데이터센터장), 김홍집(부평구리틀야구단 감독), 류선규(SSG 단장), 장광호(덕적고 감독), 전형도(SSG 코치), 정원배(인하대 감독), 조원우(SSG 코치)

60대 이상(5명) - 김시진(KBO 경기운영위원), 김재현(전 동산고 코치), 김학용(전 동산고 감독), 양후승(전 인천고 감독), 임호균(한국독립야구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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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2루수-정근우' '유격수-박진만' 2008년 여름 박진만(46)과 정근우(40)는 태극마크를 품에 안고 짐을 꾸렸다. 출발지는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결말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는 2011년 시즌부터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함께 입었다. 역대 최강 내야 수비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2루수-'악마 2루수' 정근우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캐나다와의 경기에 정근우가 2루수로 나섰다. 앞서 미국과의 경기에선 9회말 대타로 나와 2루타를 때렸고, 득점까지 기록하며 역전승의 디딤돌을 놨다. 캐나다전 1회부터 안타와 도루를 기록한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외야수-박재홍·김강민'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등장한 '괴물 신인' 박재홍(49)은 인천 연고팀은 물론, 프로야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 첫해 신인으로 지명한 김강민(40)은 공수주에서 꾸준한 기량을 과시하며 프로야구 최장 '원클럽맨'이 됐다. 두 선수가 한솥밥을 먹었던 시절, SK 와이번스는 '왕조'로 불렸다. 인천 야구장을 주름잡은 '괴물'과 '짐승'의 출현은 프로야구 판도마저 뒤흔들었다. 외야수-'호타준족' 박재홍1 [구도 인천] 슈퍼스타즈의 슈퍼스타…장명부·임호균·양승관 찰나의 환희와 기나긴 한숨이 이어진 3년 반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잠깐 반짝였고,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별빛이 명멸하는 동안 마운드에서 장명부는 초인적인 투구를 거듭했고, 임호균은 공 하나하나에 승부를 걸었다. 양승관의 방망이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쏘아올렸다. 그들이 그라운드에 나설 때면 슈퍼스타즈는 슈퍼스타즈일 수 있었다. '불멸의 기록' 장명부1985년 6월21일 인천구장은 4914명의 관중들로 채워졌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에 머문 삼미 슈퍼스타즈 고별 경기였다. 마운드에 오른 장명부는 1회부터 8실 [구도 인천] 돌핀스 돌풍의 주역…정명원·최창호·박정현·김동기 1989년 인천 연고팀이 처음 가을야구에 등장했다. 잠자고 있던 구도의 야성도 깨어났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구장)은 1만30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입장하지 못한 극성팬들이 철탑에 오르는 소동도 벌어졌다. 2000원짜리 입장권이 2만원에 팔린 암표는 기승을 부렸다.준플레이오프 3경기 선발투수는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차례로 나섰다.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해 태평양 돌핀스가 올린 62승 가운데 40승을 책임진 삼총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도 변함없이 마스크를 썼다. 돌풍은 멈출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만년 꼴찌, 한을 풀다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왕조의 탄생과 부활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응원가 '연안부두' 가사처럼 인천은 연고팀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마다 설레게 하는 야구는 계속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환희의 순간도 마주했다. 가을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됐다. 2000년 현대 연고지 이전2000년 3월16일 시범경기가 치러진 인천구장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원정팀이 안타를 치면 환호가 터졌고, 현대 유니콘스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날 신문에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신생 SK 야구단은 인천으로 연고지가 결정됐다는 기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