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박마을 초입에 세워진 비석.

인천 함박마을은 고려인 밀집지역으로 유명하다.

연수구 연수1동 마리 어린이공원 주변 주택가를 말하며 2017년부터 집단 거주촌으로 변모하기 시작해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들과 중앙아시아 현지 출신 외국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한국의 고려인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 가면 러시아 요리, 러시아 빵 등 이국적인 식료품점과 식당 및 다양한 상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고려인 밀집지역인 인천 함박마을 전경.
▲ 고려인 밀집지역인 인천 함박마을 전경.

 


 

"가장 큰 바람은 아이들 교육,
동등한 한국민 살기 원해요"

증조부 中서 독립운동, 그 후손
조모 5살때 '日軍'에 가족 몰살
아버지 따라 한국 생활 10년차

300여명 참여 맘카페 적극 활동
이주 정착 지원 등 왕성한 봉사
"지역사회 돕는 일 하고 싶어요"

▲ 차 에카트리나씨.

인천 함박마을 최대 자치단체인 '고려인 엄마들 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한국생활 10년차인 차 에카트리나씨(36)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써 주변의 어려운 고려인 동포를 돕는 일에 열심이다.

일종의 맘카페로 300여명의 고려인 엄마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왕성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제 아이들의 교육 문제라든가 양육 문제, 이런 문제를 해결 하도록 그렇게 하고요. 그리고 우리 마을 행사 때 자원봉사도 하고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외국에서 고려인 엄마가 왔는데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이제 고려인 엄마 카톡 단톡방에서 공지를 보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인천 고려인 엄마 모임 대표로 사회적인 문제, 노인 문제도 그렇고 또 한국의 사회적인 문제 등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녀의 선조들은 여느 고려인처럼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았다. 지난 2004년 한국을 방문한 그녀의 할머니인 최소야씨는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두만강이 보이는 중국땅 황고에서 1928년 태어난 최씨는 불과 5살때인 1933년 가족 7명을 일본군에게 잃었다. 가족들이 집안에 갖혀있을 때 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모두 사망했다. 아버지와 밖에 나가 있던 최씨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최씨는 아버지와 함께 그해 겨울 만주를 떠나 1934년 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연해주로 이동했다. 최씨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37년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돼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최씨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아버지는 독립군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일본군이 마을로 쳐들어 오면 보초를 서다가 총을 쏴서 마을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했다. <2004년 3월7일 조선일보 보도>

에카트리나씨 선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거의 한달 이상 갔는데 거기서도 일본 간첩을 색출한다며 많은 사람들을 체포했다.

▲ 고려인 밀집지역인 인천 함박마을 전경.

증조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양부모에 맡겼고, 할머니는 모든 가족을 잃은체 혼자 살아가야 했다. 그 할머니의 후손이 바로 에카트리나씨다.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 일했고, 남편과 함께 5년 전 인천 함박마을로 이사했다.

“2016년도에 이사 왔는데 고려인들 지금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서울보다 인천이 좀 더 조용하고 여기 남동공단이 있기 때문에 고려인들 거의 공단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러는 사이 아이들 둘이 태어났다. 최근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아이들 교육문제다.

“한국은 참 진짜 사람 살기 편하고 아이 키우기도 좋은 나라일 것 같아요. 하지만 애들키우는데 월마다 우리 가족 교육비 100만 원 이상 들어요.”

그동안 한국 아이들이 유치원 비용을 지방정부에서 지원받는 것과 달리 고려인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었다. 다행히 올해부터 만 5세 고려인 아이들에게도 1년동안 월 20만원 정도의 지원금이 나오고 있지만 타 지자체인 안산이나 시흥, 부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고려인 지원단체의 분석이다.

“이게 제일 제일 큰 문제예요. 많은 고려인 엄마들이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유치원이 못 보내고 있어요. 5살 때 6살 때까지 엄마들이 그냥 데리고 있어요. 엄마들이 거의 한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못 가르치죠. 애들이 유치원이라도 다녀야 한국말을 빨리 배울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니 한국말을 못 배우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국 아이들이랑 어울리지 못하니 제일 아쉽죠”

그녀의 가장 큰 바램은 아이들이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게 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아이들을 낳았는데 아무런 혜택을 못 받고 한국 국민으로서 이제 인정을 못 받으니까.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가 집이에요. 여기는 고향이에요. 그래서 같은 민족 민족으로서 같은 핏줄로서 이 같은 역사를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렇다치더라도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한국 사람들처럼 똑같이 그냥 동등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남창섭·이재민 기자 csnam@incheonilbo.com

 


 

“한국 관문·다양성 도시 인천,
고려인 더 소중히 포용해야”

함박마을 일·주거·교육 삼박자
단일마을 국내 최대 이주 타운
고려인 비등록 포함땐 7000명

4개 주민회, 도새재생 등 사업
올해 송도와 공동축제 준비 중
양 지역 레인보우 브리지 추구

▲ 손정진 너머 인천고려인문화원 공동대표.

인천 함박마을에 위치한 '너머 인천고려인문화원'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손정진 대표는 활발한 고려인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희가 주로 하는 일은 고려인들의 국내외 정착을 지원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인 지원 활동, 그리고 그분들이 여기 한국 사람들이 있어서 어떤 시민으로서 또는 이주민으로서 동포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원들, 예를 들면 한국어 교육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일인데 고려인들이 스스로 자기 커뮤니티에서 스스로를 조직화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한국 사회에 요구하고 풀어나가고 할 수 있도록 그런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일 세 가지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함박마을이 고려인들이 모여든 이유는 무엇일까. 손 대표는 3가지 이유를 꼽았다.

“첫 번째는 일할 수 있는 공단이 가까운 지역 이분들이 한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주로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 나가시는데 함박마을 같은 경우는 가까운 데 남동공단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첫 번째 조건이 있고 두 번째는 보시다시피 함박마을 같은 경우에는 원룸 투룸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집값도 비교적 저렴하고 보증금 없이 이제 방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구조여서 집값이 싸다는 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길 하나만 건너면 여기 함박 초등학교라든가 초등학교 중등학교가 있어서 아이들이 비교적 가깝게 교육 환경이 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서 함박 마을에 다수 모이시게 됐습니다.”

함박마을은 단일 마을로는 국내 최대 고려인 마을이다.

“여기 전체 주민이 한 공식적으로 1만 명쯤 되는데 등록되어진 고려인들 숫자로는 한 5천 몇 명 되고 고려인으로 분류가 잘 안 되지만 그분들까지 포함하면 여기 최대 7천 명까지 산다고 여기 지역 주민센터에서는 그렇게 파악을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 거리도 보시면 이렇게 이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들이라든가 가게들이 육 칠십 군데가 있는데 그렇게 단일 마을의 단일 거리 형성으로도 국내 최대 고려인 마을입니다.”

▲ 고려인 밀집지역인 인천 함박마을 전경.
▲ 고려인 밀집지역인 인천 함박마을 전경.

함박마을에는 2년 전 전국 최초로 고려인 주민회를 설립했다.

주민회는 이전의 개별 고려인 주민 단체들이 모여서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300여명 이상이 모인 '고려인 엄마들 모임'과 100명 정도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고려인 상인회, 청년 100여명이 모인 인천 고려인 청년회, 고려인 장애인가족 모임 등입니다.

주민회는 함박마을 관련된 도시재생사업은 물론 보육료 지원 등 인천시 정책, 고려인 권익활동 등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눈에 띠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인천의 대표적 이주민 지역이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함박마을과 송도국제도시가 공동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송도국제도시는 외국학교와 많은 이주민들이 살고 있는 국제도시이고, 함박마을은 고난 속에서 어렵게 살아온 이주민의 마을인 만큼 양 지역이 손을 잡고 교류해 일종의 레인보우 브리지를 만들어 가자는데 의견을 같이한 것이다. 향후에도 차이나타운 등 인천의 다양한 이주민 마을들과 함께 다양성과 포용의 도시라는 인천의 이미지 확립에 적극 나서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들고 나고 뭔가 그런 것들이 오고 가고 할 때 여기가 관문이 됐던 도시고 그런 도시라면 당연히 국내에 있는 어떤 도시보다도 그런 그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그 특성이 인천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또 소중하게 생각해야 될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 면에서는 우리 인천이 고려인들을 좀 소중하게 생각하고 포용을 하면 정말 고마운 일이죠.”

손 대표의 작은 바램이다.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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