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결정적 장면들]
6회말-왕조의 탄생과 부활

숱한 영욕의 시간 딛고 왕조에 열광한 21세기

▲2000년 현대 연고 이전…SK 창단
현대, 서울 입성 조건으로 인천 떠나
SK 창단식서 “시민 분노·배신감 커”
김경기 “인천팬 두 동강…안타까움”
재정난 빠져 서울 못 가고 최후 맞이

▲2007년 와이번스 왕조의 시작
KS 1·2차전 연패 후 분위기 침체
4차전 '신인' 김광현 역투로 반등세
김재현, 시리즈 내내 맹타 MVP에
당해 우승 시작 '리그 최강자' 군림

▲2018년 가을의 전설
박정권, PO 1차전 끝내기 접전 서막
최종전도 백투백 아치 끝내기 승리
6년 만의 KS, 6차전까지 가는 혈투
최정·한유섬·김광현 명승부 마무리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응원가 '연안부두' 가사처럼 인천은 연고팀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마다 설레게 하는 야구는 계속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환희의 순간도 마주했다. 가을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됐다.

 

▲ 1998년 10월28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 관중석. 2000년 3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입성'을 이유로 인천 연고권을 포기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10월28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 관중석. 2000년 3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입성'을 이유로 인천 연고권을 포기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2000년 현대 연고지 이전

2000년 3월16일 시범경기가 치러진 인천구장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원정팀이 안타를 치면 환호가 터졌고, 현대 유니콘스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날 신문에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신생 SK 야구단은 인천으로 연고지가 결정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현대 유니콘스 간판타자였던 김경기는 “선수들도 연고지 이전을 신문 보고 알았다”며 “인천 야구팬이 두 동강 나는 현실이 제일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연고를 둘러싼 갈등은 쌍방울 레이더스 처리 과정에서 불거졌다. 쌍방울 대신 프로야구에 뛰어든 SK는 서울 진입을 노렸다. 기존 구단들이 신생팀에 서울을 양보할 리가 없었다. 현대는 수원을 SK 연고지로 넘기려고 했다. 'SK에 지역권을 양보하는 구단에 서울 또는 기타 도시를 개방한다'는 KBO 결정을 의식한 행보였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SK 창단이 늦어지자 KBO 이사회는 3월15일 연고지를 최종 확정했다. 현대 유니콘스에는 '2년 후 서울 입성'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SK 와이번스 창단식에서 당시 최기선 인천시장은 “현대 유니콘스 연고 이전으로 인천시민 분노와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했다.

▲ 1998년 인천공설운동장(도원구장)에 걸린 현수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인천시민의 한을 풀어준 현대 유니콘스는 연고지 이전으로 한 맺힌 존재가 됐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인천공설운동장(도원구장)에 걸린 현수막.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인천시민의 한을 풀어준 현대 유니콘스는 연고지 이전으로 한 맺힌 존재가 됐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현대와 인천 야구의 악연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인천 연고 1순위 기업은 현대였다. 하지만 현대는 인천 프로야구단 창단 제안을 거절했고, 1995년 9월 470억원에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2000년 4월21일부터 인천에서 SK 와이번스와 현대 유니콘스가 주말 3연전으로 처음 맞대결했다. 경기가 끝나고 현대 유니콘스 선수들은 경찰 보호를 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현대 유니콘스는 수원구장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듬해 모기업 부도로 재정난에 빠진다. 2007년 해체될 때까지 서울 입성도 실현하지 못했다. 박재홍은 “어쩔 수 없이 수원에 갔는데 공허한 구장에서 경기를 했다”며 “인천 야구팬들도 현대라는 거대 그룹이 야구단을 인수했다가 연고지를 옮기는 걸 보고 허탈감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00년 3월31일 SK 와이번스 창단식이 열리고 있다. SK 와이번스는 현대 유니콘스가 떠난 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다.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0년 3월31일 SK 와이번스 창단식이 열리고 있다. SK 와이번스는 현대 유니콘스가 떠난 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다.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7년 10월29일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직후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7년 10월29일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직후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2007년 'SK 왕조'의 시작

2007년 10월24일 문학구장에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국시리즈 3차전을 하루 앞둔 휴식일이었다.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SK 와이번스는 1·2차전에서 두산 베어스에 맥없이 무너졌다. 김성근 감독의 '지옥훈련'이 화제였지만 정작 그날은 훈련 지시가 없었다. 박경완은 “이대로 끝나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서울로 이동하기 전에 몸 풀면서 기분 전환하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 2007년 10월29일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SK 와이번스 주장 김원형(가운데)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7년 10월29일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SK 와이번스 주장 김원형(가운데)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선수들 틈에서 김재현은 누구보다 방망이를 열심히 휘둘렀다. 김재현은 2005년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은 뒤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중심타자로 활약했지만, 그해 1할대 타율로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김성근 감독은 김재현이 훈련하는 모습을 눈여겨봤다.

3차전은 이튿날 잠실구장에서 열렸다. 2차전 출장 명단에서 빠졌던 김재현은 3번 타자로 전진 배치됐고, 1회초 2루타로 선취 타점을 올렸다. 김재현과 박경완, 박재홍 등 베테랑 활약으로 SK 와이번스는 9대 1로 승리를 거뒀다.

▲ 2007년 한국시리즈 MVP 김재현./사진제공=2008년 SK 와이번스 팬북
▲ 2007년 한국시리즈 MVP 김재현./사진제공=2008년 SK 와이번스 팬북

 

▲ 2007년 10월29일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SK 와이번스 선수단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7년 10월29일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SK 와이번스 선수단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22승의 MVP 투수 리오스와 3승의 신인 투수 김광현의 맞대결이 펼쳐진 4차전에서 판세는 뒤바뀌었다. 포수 마스크를 썼던 박경완은 “1회에 공을 받으면서 '이런 공도 던질 수 있나' 싶었다”며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광현이 무실점 행진을 벌이던 5회초 조동화와 김재현은 연속타자 홈런포를 쏘아올렸다. 김재현은 5차전 8회초 결승 3루타, 6차전 3회말 승부에 쐐기를 박는 홈런을 터뜨렸다. 한국시리즈 MVP도 김재현에게 돌아갔다.

'이대로 끝나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은 2006년 시즌 직후부터 넉 달간 이어진 지옥훈련에서 비롯했다. 왕조의 주축 타자로 활약했던 박정권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훈련을 많이 했는데 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SK 와이번스는 2008년 새해가 밝자마자 다시 65일간 지옥훈련을 떠났다. 결과는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 2018년 11월12일 명승부 끝에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순간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1월12일 명승부 끝에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순간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2018년 가을의 전설

2018년 10월27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1차전 9회말 박정권이 타석에 들어섰다. 2007년 김재현처럼 그해 박정권은 1할대 타율로 부진에 시달렸다. 8대 3으로 앞서가던 SK 와이번스가 홈런포를 가동한 넥센 히어로즈에 동점을 허용한 상황이었다. '미스터 옥토버' 박정권의 타구는 문학구장을 반으로 가르며 담장을 넘어갔다. 끝내기 홈런은 그해 가을야구 내내 벌어진 명승부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 2018년 10월27일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터뜨린 SK 와이번스 박정권./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0월27일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터뜨린 SK 와이번스 박정권./사진제공=SSG 랜더스

2연승 후 원정에서 2연패한 SK 와이번스는 문학구장에서 넥센 히어로즈와 끝판 승부를 벌였다.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한 끝에 10회말 마지막 공격에 나선 SK 와이번스는 9대 10으로 밀리고 있었다. 한국시리즈 진출과 탈락이라는 갈림길에서 김강민과 한유섬의 연속타자 홈런이 터졌다. 왕조의 주역들은 플레이오프 시작과 마무리를 모두 끝내기 홈런으로 장식하며 SK 와이번스를 6년 만에 한국시리즈 무대로 올렸다.

한국시리즈는 10년 만의 맞대결이었다. 상대는 왕조의 라이벌로 치열한 승부를 벌였던 두산 베어스였다. 정규시즌에서 93승을 거둔 두산 베어스에 14.5경기 차까지 벌어졌던 SK 와이번스는 도전자 위치로 내려왔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 코치를 지냈던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2018년 SK 와이번스는 선발과 불펜 투수 모두 좋았다. 특히 홈런 타자들이 많아서 상대하기가 두려운 팀이었다”고 말했다.

예측 불허의 승부를 알린 서막은 '가을 본능'이 깨어난 박정권의 홈런이었다. 박정권은 2대 3으로 뒤져 있던 6회초 상대 에이스 린드블럼을 상대로 역전 2점 홈런을 터뜨렸다. 2승 2패로 팽팽했던 5차전에서도 박정권은 8회말 적시타로 승리를 이끌었다.

▲ 2018년 11월2일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홈런으로 경기를 끝낸 SK 와이번스 한유섬./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1월2일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홈런으로 경기를 끝낸 SK 와이번스 한유섬./사진제공=SSG 랜더스

5시간 넘게 펼쳐진 6차전 승부를 바꾼 것도 홈런이었다. 패색이 짙던 9회초 2사에서 최정은 동점 홈런을 터뜨렸고, 연장 13회초 한유섬의 타구는 잠실구장 관중석 상단에 꽂혔다. 에이스 김광현은 13회말 불 같은 강속구로 명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가을의 전설은 다시 쓰였다. 박정권은 “수많은 가을 야구 중에서도 굴곡이 있었고, 절실했던 2018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 2018년 11월12일 한국시리즈 시상식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SK 와이번스 선수단./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1월12일 한국시리즈 시상식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SK 와이번스 선수단./사진제공=SSG 랜더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2018년 플레이오프 1차전, 내 인생 경기”

[왕조의 중심 '미스터 옥토버' 박정권]

“불확실성·부담감 안고 준비했던 기억”
“끝내기 홈런 치고 뭔가 해소되는 느낌”
“1루 수비 자신감, 훈련·경험에서 나와”

2018년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박정권(41·사진)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데뷔 이래 가장 적은 14경기에 출장한 시즌이었다. 마음은 비웠지만 “뭐라도 해보자”고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SSG 랜더스 2군 타격코치를 맡고 있는 그는 지난 5월27일 강화퓨처스파크에서 '인생 경기'로 주저 없이 2018년 플레이오프 1차전을 꼽았다.

 

▲가을 야구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다.

-특히 2018년은 마지막 우승이었고, 우여곡절이 많았다. 엔트리에 들어가는 것도 불확실했다. 그만두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때였다. 남모르게 준비는 많이 했다. 부담도 컸다. 뭔가 해줄 거라는 시선도 분명히 있었을 테고.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끝내기홈런 쳤을 때 기분은.

-어떻게든 당겨서 치려는 마음이었다. 몸쪽 승부는 안 할 거라고 생각해서 바깥쪽만 보고 있었다. 근데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맞았다.(웃음) 처음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2루를 돌면서 한 방에 뭔가 시원하게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치열한 경쟁 끝에 2009년부터 주전 1루수로 활약했다. 수비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자부심은 있는데, 비법은 없다. 공을 많이 받아야 한다. 1루에는 강한 타구가 많이 오기 때문에 감각이 중요하다. 상무에서 전역했을 때 김성근 감독님이 부임하셨는데,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었다. 자신감은 훈련과 경험에서 나온다.

 

▲코치 생활 3년차를 맞았다.

-코치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는 줄 알았는데, 힘들어 하는 이유를 알았다. 서 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웃음) 야구를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야구에 대해서도 진지해졌다. 선수들에게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하나의 케이스에 여러 가지 보기를 줘야 하고, 상황이나 기분도 헤아려야 한다. 매일 머리를 싸매고 있다.

 

/글 이은경·이순민·이아진·사진 양진수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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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를 신흥 명문 구단으로 도약시킨 좌타자들의 활약은 '인천 SK' 구호가 물결을 이룬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의 첫 번째 페이지를 열었다. 외야수-'국민 우익수' 이진영2003년 10월19일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문학구장은 3만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외야수-박재홍·김강민'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등장한 '괴물 신인' 박재홍(49)은 인천 연고팀은 물론, 프로야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 첫해 신인으로 지명한 김강민(40)은 공수주에서 꾸준한 기량을 과시하며 프로야구 최장 '원클럽맨'이 됐다. 두 선수가 한솥밥을 먹었던 시절, SK 와이번스는 '왕조'로 불렸다. 인천 야구장을 주름잡은 '괴물'과 '짐승'의 출현은 프로야구 판도마저 뒤흔들었다. 외야수-'호타준족' 박재홍1 [구도 인천] 슈퍼스타즈의 슈퍼스타…장명부·임호균·양승관 찰나의 환희와 기나긴 한숨이 이어진 3년 반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잠깐 반짝였고,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별빛이 명멸하는 동안 마운드에서 장명부는 초인적인 투구를 거듭했고, 임호균은 공 하나하나에 승부를 걸었다. 양승관의 방망이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쏘아올렸다. 그들이 그라운드에 나설 때면 슈퍼스타즈는 슈퍼스타즈일 수 있었다. '불멸의 기록' 장명부1985년 6월21일 인천구장은 4914명의 관중들로 채워졌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에 머문 삼미 슈퍼스타즈 고별 경기였다. 마운드에 오른 장명부는 1회부터 8실 [구도 인천] 돌핀스 돌풍의 주역…정명원·최창호·박정현·김동기 1989년 인천 연고팀이 처음 가을야구에 등장했다. 잠자고 있던 구도의 야성도 깨어났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구장)은 1만30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입장하지 못한 극성팬들이 철탑에 오르는 소동도 벌어졌다. 2000원짜리 입장권이 2만원에 팔린 암표는 기승을 부렸다.준플레이오프 3경기 선발투수는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차례로 나섰다.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해 태평양 돌핀스가 올린 62승 가운데 40승을 책임진 삼총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도 변함없이 마스크를 썼다. 돌풍은 멈출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만년 꼴찌, 한을 풀다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