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7년 10월4일 소련 상공에 수박만 한 공 하나가 높이 떠올랐다. 그 공은 곧 지구로 우주 최초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삐...삐...삐...삐...” 별다른 뜻 없는 짧은 신호였지만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신호를 보낸 공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한 미국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공은 소련이 쏘아 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였다. 미국인들은 스푸트니크를 만든 나라가 경쟁국 소련이라는 사실에 더욱 큰 공포를 느꼈다. 인공위성에 핵무기를 올려 아메리카 대륙에 떨어뜨릴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여행의 동반자'라는 뜻의 스푸트니크는 소련이 극비리에 제작한 인공위성으로 무게는 83.6㎏에 불과했지만 20세기 중후반을 뜨겁게 달군 우주 경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자존심 대결은 인류 역사상 과학 기술의 가장 급격한 성장을 이끌기도 하였다. 미국의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스푸트니크 쇼크(Sputnik crisis)에 급히 두 개의 국가 기구 설립을 지시했는데, 바로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과 항공우주국(NASA)이다. 국방고등연구계획국은 국방부 산하의 R&D 기획, 평가 및 관리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인터넷의 원조인 아르파넷을 처음 개발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항공우주국은 현대 우주 개발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며, 우주 탐사 활동과 우주선에 관한 연구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이 부랴부랴 우주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소련의 기술력은 한발 더 앞서 있었다. 같은 해 11월3일, 소련이 세계 최초로 생명체를 우주로 내보내며 미국은 다시 한 번 패닉에 빠졌다. 비록 사람이 아닌 강아지를 우주선에 탑승시켰지만,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한 걸음 더 달아나는 모습을 만방에 보여주었다. 미국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미 해군은 뱅가드 로켓 계획을 급히 진행시켜 12월6일 뱅가드 TV3을 발사하였다. 하지만 너무 성급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로켓은 발사 4초만에 폭발하였다. 연소실에 있던 고온의 가스가 인젝터의 낮은 압력 때문에 연료통으로 새어 들어간 것이다. 로켓이 산산조각 나는 폭발 장면은 TV로 생중계되었고, 미국은 다시 한 번 굴욕을 맛보았다.
하지만 미국에게 더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1961년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냈다가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아폴로 계획(Apollo program)을 발표하였다. 우주 항공 기술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소련을 이기겠다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공우주국에는 말 그대로 천문학적 비용이 투자되었다. 1965년에는 항공우주국의 예산이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0.75%, 당시 한국 GDP의 150%에 해당하는 금액이기도 하였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유인 우주선 발사는 아폴로 7호부터 시작되었으며, 8호는 사람을 태우고 달 궤도를 도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아폴로 9호에서는 달 착륙선에 처음으로 사람이 탑승했으며, 착륙선이 계획에 맞게 제대로 제작되었는지 확인하였다. 그리고 아폴로 10호는 달에 착륙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계획을 수행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아폴로 11호의 예행 연습이었다. 마침내 1969년 7월20일, 아폴로 11호에 탑승한 닐 암스트롱은 달에 발을 내디디며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멋진 말로 미국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 주었다.

/송현수 과학 저술가·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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