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 첫 운행된 우주 왕복선은 여러 사고를 겪으며 2011년 운행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미국의 달 착륙 선점으로 우주 경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1960년대를 보낸 NASA는 영광스러운 승리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소련과의 경쟁이 사라지며 우주에 대한 관심도 식고, 예산 역시 급격히 감소한 것이다. 임무를 충실히 완수한 NASA는 줄어든 예산만큼이나 그 역할도 축소되었다.
실제로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우주 기술 선도에 대활약을 한 NASA는 우주 경쟁의 라이벌이던 소련이 망한 이후 연구비 지원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경쟁이 최고조에 달하던 1966년 미 연방 예산의 4.41%에 해당하던 연구비는 달 착륙 직후인 1970년 1.92%로 절반도 안 되게 줄었으며, 1975년부터는 1%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2010년대 들어서는 0.5% 내외의 수준으로 더욱 감소하였다.
또한 NASA가 계획 중이던 화성 탐사 등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줄어든 예산 때문에 연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거의 유일하게 진행 가능했던 프로그램이 우주 왕복선이다. 1981년 4월12일 첫번째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는 달에 다녀온 베테랑 우주 비행사 존 영과 로버트 크리픈을 태우고 이틀 동안 지구를 무려 37바퀴 돈 뒤 돌아왔다. 그 기간 동안 미지에 가까운 무중력 상태가 인간의 신경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실험하였다. 1983년에는 두번째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도 첫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우주 탐험에 합류하였다.
우주 왕복선은 첫 발사 이후 5년 동안 20회 넘게 별 문제 없이 비행하였다. 이제 우주를 오가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일상에서도 무시무시한 사고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86년 1월28일 날씨는 무척 추었지만 우주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지난 5년간 우주 왕복선이 지구와 우주를 수십 차례 오갔지만 이번 운행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NASA는 아이들에게 우주에 대한 꿈을 심어 주기 위해 고등학교 선생님 크리스타 매콜리프를 우주 비행사로 선발하였다.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 공간에서 지구의 학생들에게 수업이 계획되어 있었다.
따라서 TV로 생중계 될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 미국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 수업은 진행되지 못했다. 챌린저호가 이륙 73초 만에 폭발하며, 승무원 7명 모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TV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크나큰 충격에 말을 잃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던 NASA에서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 것일까? 우주 왕복선은 기본적으로 로켓의 비행 원리와 유사하다.
다만 우주 왕복선에는 초기 가속을 담당하는 고체 로켓 부스터가 양옆에 하나씩 달려 있다. 각 부스터는 길이 45m, 직경 3.7m의 원통형으로 무게는 약 50t이며, 발사 2분 후 고도 46㎞ 지점에서 분리되어 바다로 떨어지도록 설계되었다.
챌린저호의 폭발은 이 부스터에서 비롯되었다. 우측 부스터의 틈에서 새어 나온 가스로 인해 발생한 화염이 외부 연료 탱크를 태워 액체 수소가 누설되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부스터 하단의 지지대가 분리되며 연료 탱크와 부딪혀 수소 유출을 가속화시켰다. 한결 가벼워진 수소 탱크는 가속되며 바로 위 산소 탱크를 그대로 가격하였다. 이로 인해 다량의 수소와 산소가 순식간에 폭발하며 마침내 우주 왕복선은 우주 탐험의 꿈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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