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보는 가마솥에서 IT기기로…그때나 지금이나 '마지막 비상구'

개항도시 인천, 전당업 활성화…1897년 11곳 운영
인천전당조합 1901년 5월 설립·조합원 30명 달해

1915년 가마솥 맡기고 5원 가져간 기록 있어
귀금속은 단골 품목…노트북·명품 취급점도
찾는 사람 여전…전당업 사라지지 않을 것
전문가 “금융취약계층 복지정책 우선돼야”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만나는 허름한 전당포.

이런 모습을 간직한 전당포가 사라지고 새로운 전당포가 들어서고 있다. 딱딱한 인상을 주는 쇠창살이 아닌 안락한 소파가 손님을 맞이하고 매장 보안은 전문업체가 관리한다. 모바일로 돈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면서 생긴 변화다.

담보되는 물건도 달라졌다. 과거 귀금속과 시계 등이 주요 담보물이었지만 이제는 명품가방과 IT기기 등 고가 제품도 담보물이 된다.

전당업이 오랜 세월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은 몇푼 융통을 위해 오늘도 전당포를 찾는다. 전당포가 앞으로도 골목 구제 금융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다. 전당포 이야기는 계속된다.

 


 

▲ 개항도시 인천은 근대 전당업이 활성화됐다. 1937년대 일본지계 내 거리 풍경. /사진제공=인천 중구청

#인천 개항과 함께 전당업 활발

개항도시 인천은 근대 전당업과 맥을 같이한다.

1883년 한적한 어촌 마을이던 인천항(제물포항)은 개항이 되자 국제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외국인과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빠르게 변화해갔다. 상업도시로 성장하면서 전당업도 활성화된 것이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원이 펴낸 오가와 유조의 '신찬인천사정(新撰仁川事情)'을 살펴보면 개항 직후인 1897년 개항장 일대에는 무려 11개의 전당포가 운영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들 전당포는 일본거류지뿐 아니라 각국 거류지와 한국인동네 등에서 영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당포 영업주는 일본인이 대다수였다.

한국인이 거주하던 지역에도 전당포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인 뿐 아니라 한국인 대상으로 영업이 이뤄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00년대 초반 전당포는 본격적으로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다.

▲ 1890년대 제물포 해안지대(현 중구청앞)./
▲ 1890년대 제물포 해안지대(현 중구청앞)./사진제공=인천 중구청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한국 최초 철도 경인 전철이 1899년 개통하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산업 활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전당포의 수도 차츰 늘어나 조합 설립까지 이르렀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이 번역한 '인천개항25년사'에 따르면 인천전당포조합은 1901년 5월 설립됐으며 조합원은 30여명에 달했다.

지자체에서는 주민들에게 적은 액수의 돈을 융통해주는 목적으로 공설전당포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 1933년 2월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인천부는 경비 2만원을 들여 공설전당포를 설립할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옛 자료들을 살펴봤을 때 개항 도시인 인천은 다른 도시보다 비교적 빨리 근대 전당업이 활성화됐을 것”이라며 “전당포가 범죄에 연루되다 보니 인식이 안 좋지만 어려운 서민들의 유일한 숨통이었고, 생활이 담긴 곳이었다. 맡겨진 담보들은 당시의 시대 흐름을 볼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전당포는 사회학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솥부터 금까지, 담보로 보는 생활상

지금으로부터 107년 전인 1915년, 전당포는 가마솥도 저당잡았다.

1915년 1월 매일신보에는 진남포 출신 장경순이라는 사람이 인천 사동의 한 집에서 가마솥 두 개를 훔쳤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장경순은 가마솥을 전당포에 맡기고 5원을 가져간 것으로 조사됐다.

기사를 통해 가마솥은 당시 서민 생활에서 값어치가 나갔던 물건이었으며 현금과 같이 쓰임새가 있었다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가마솥 대신 반지나 목걸이 등 금붙이가 전당포에 맡겨진다. 이처럼 담보는 시대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화해 왔다.

경제적 가치가 있어야만 시장에 융통될 수 있기에 담보는 생활에 도움이 되거나 필요한 물건들이 주를 이루는 게 일반적이다.

▲ 전당포 간판./인천일보DB
▲ 전당포 간판./인천일보DB

담보들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훑어볼 수 있는 이유다.

공업화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1970∼80년대에는 녹음기, 비디오 리코더, 시계 등이 주요 담보물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1990년에는 냉장고, TV와 같은 대형전자기기가 전당포로 몰렸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금과 보석류가 주로 거래됐다. 현재 노트북과 같은 IT 기계와 명품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당포가 생기기도 했다.

중구 A전당포 대표는 “50년 가까이 전당포 일을 하니 안 다뤄본 물건이 없다”며 “한때 대학생들의 필수품이었던 전자계산기가 많이 들어올 때가 있었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워크맨(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이 수두룩 맡겨지곤 했다. 스마트 폰이 도입되기 전에는 카메라도 전당포 단골 품목이었는데 중고가격이 너무 내려가 이제는 받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자제품이 흔해지고 가치가 쉽게 변해 담보물로 받지 않고 주로 귀금속만으로 취급한다”고 덧붙였다.

전당포 모습도 달라졌다. 보안을 중시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편안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다.

산업 발전에 따라 더는 쇠창살에 보안을 맡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미추홀구 B전당포 대표는 “전당포가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 보니 편안함을 주는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고 있다”며 “과거 보안이 취약했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보안 업체가 관리를 해준다. 또 돈이 현금으로 오가기도 하지만 모바일을 통해 거래되면서 모습이 다양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 전당포.
▲ 전당포.

#서민과 계속될 전당포

카드와 은행 등 각종 대출 수단이 등장하면서 전당포가 사라질지 알았지만 살아남았다. 아직 전당포를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인천지역 전당포 업계는 옛 모습을 간직한 전당포가 문 닫을 수 있겠지만, 전당업 자체는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부평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는 50대 이모씨는 “현재 전당포 점포 수가 줄어들고 있는 건 맞지만 전당업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어느 시대든 어려운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은행을 가지 못하는 사정을 가진 사람들도 여전히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제 구조상 전당업 자체가 사라지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는 전문가 진단이 나온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에게 전당업은 불법 사금융으로 가기 직전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이장연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부업 자체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기 어렵다”면서 “그러나 대부업이 없어지게 된다면 이 업체들을 사용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불법 사금융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대부업은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리기 전 비상구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건강한 금융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금융 업체들에 대한 규제 이전에 복지 정책이 우선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금융 취약계층이 고금리 늪에 빠지지 않도록 정부에서 재생할 사회와 기회를 마련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며 “예를 들어 돈이 없어 빚을 져야만 했던 부모에게 똑똑한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의 재능이 빚에 묻히지 않고 발휘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조를 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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