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중개사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2019년 가을, 김도진이 화수동 부동산을 찾아갔을 때였다. 오랜 꿈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대화가 꼬리를 물었다. “거기 재개발하잖아요.” 잊고 있던 세 글자, '재개발'이 공인중개사 입밖으로 나왔다.
“10년 전에도 똑같은 진정서를 낸 적이 있습니다. 지금 또다시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쓰는 저희들의 마음은 답답하고 자괴감마저 듭니다.” 일꾼교회로 다급하게 돌아온 김도진은 동구에 보내는 진정서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 인천 동구 화도고개에서 내려다본 화수화평 재개발 구역. 화도진공원 9배에 이르는 18만998㎡ 면적이다. 2009년 정비구역 지정 이후 지지부진했던 재개발 사업은 2019년 시공사 선정을 계기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10년 만에 다시 쓴 진정서
화도진공원 아래 쌍우물을 마주보고 있는 화수동 183번지. 지금의 일꾼교회에 터를 잡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줄임말로 인천산선의 역사는 19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교육이 이뤄진 인천산선은 민주노조운동의 거점이자, 1970년대 '똥물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안식처였다.
일꾼교회 목사로 인천산선 8대 총무를 맡은 김도진에게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기념관' 건립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꿈이었다. 교회 건물에 기념관을 만들려면 2층에서 운영 중인 동구 푸드뱅크 사무실을 옮겨야 했다. 임대 공간을 알아보려고 부동산을 다녀온 김도진은 서랍을 열어 진정서부터 꺼냈다. 진정서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역사적 가치를 존중해서 재개발에서 제외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다. 날짜는 2009년 7월27일, 재개발 조합 설립 직전이었다. 그의 책상에는 임대차 계약서 대신 10년의 시차를 두고도 내용이 바뀌지 않은 진정서 2부가 놓였다.
멈춰 있던 재개발 시계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화수화평 구역 재개발 조합은 그해 6월30일 시공사 선정 총회를 열었다. 시공사는 현대건설, 한 달 뒤 국토교통부 '시공능력 평가'에서 2위에 오른 업체였다. 재개발 과정에서 시공사 선정은 사업성을 보여주는 가늠자다. 높은 수익이 예상되는 구역일수록 건설사 수주전이 치열하다. 이른바 '1군 브랜드' 참여는 재개발 수익이 날 만한 곳이라는 의미다.
조합장을 맡은 지 반년 만에 시공사 선정을 이끌며 사업을 본궤도에 올린 전기원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현대건설이 왔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제가 모셔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구역은 면적이 커서 조그만 건설회사는 사업을 할 수가 없어요.” 화수화평 재개발 시공사 선정은 2009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되고, 조합설립 인가를 받은 지 꼬박 10년 만이었다.
▲“명품 아파트 공급” 불붙은 재개발
화수화평에 봄이 찾아온 지난해 3월, 김도진은 재개발 조합과의 면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외지인 소유주가 많다는데 과연 재개발이 주거환경 개선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요. 그래도 찬성 주민들과 충돌하고 싶진 않으니까 재개발 자체를 반대하지 않지만 가까운 쌍우물과 함께 보존하는 방안을 요구했죠.”
앞서 두 차례 면담은 평행선을 달렸다. 첫 만남은 그로부터 석 달 전인 2020년 12월22일이었다. 그날 오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보존대책협의회'가 발족했다. 협의회에 참여한 민운기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간사도 면담에 동석했다. “인천산선 건물을 존치하는 방향으로 설계 변경을 검토해 달라고 했어요.” 한 달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건축사무소 관계자가 내놓은 답변은 “사업성이 떨어진다”였다고 민운기는 떠올렸다.
다시 불붙은 재개발은 거침없었다. 시공사가 선정된 뒤부터 물밑에선 '화수화평 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정비계획 수립 및 정비구역 지정' 변경 절차가 이뤄졌다. 화도진공원 9배에 이르는 18만998㎡ 면적에 3200세대 아파트를 건설하는 계획이었다.
“전염병 확산 방지책 일환으로 불편한 장소에서 개최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2020년 10월13일 재개발 구역에서 살짝 벗어난 화평동 황인의원 주차장에 천막이 설치됐다. 간이의자는 드문드문 놓였다. “동인천 랜드마크 명품 아파트를 조합원 여러분께 공급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건축심의와 사업시행 인가 과정을 거칠 것입니다.” 정비계획 변경안을 알리는 주민설명회에서 마스크를 쓴 조합장 전기원이 말했다.
일주일 뒤 정비계획 변경안은 동구의회 복지환경도시위원회로 넘어갔다. 의견 청취 안건을 심의하는 자리에서 동구 도시정비과 공무원은 “올해 정비계획을 결정한 후 2021년 사업시행 인가, 2022년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거쳐 이주를 시작하고 2023년 착공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안건은 원안 가결됐다.
▲찬성과 반대, 갈림길에 선 동네
텔레비전 소음 사이로 가위질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거울 3개가 비추는 미용실 안으로 노을빛이 스며들었다. “단독주택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찬성 도장을 안 찍었어. 빌라들은 다 찬성했고.” 지난해 5월 마지막 주 저녁, 검정 앞치마를 두른 박희순이 맞은편 주택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3층짜리 건물은 박희순 가족들의 공간이다. 1층은 미용실, 위층에는 부부와 자녀가 산다. 결혼한 뒤로 박희순은 40여년 동안 화수동을 떠난 적이 없다. “파마가 3000원”이었던 시절 “기와집 바깥채를 털어서 시작”한 미용실은 평생직장이 됐다. 남편 이보형은 4대째 같은 자리에서 살아온 화수동 토박이다.
미용실을 중심으로 화수동 길은 여섯 갈래로 나뉜다. 길목 한가운데, 미용실 문 앞에는 우물이 있다. 동구가 세운 '화수동 쌍우물' 팻말에는 “19세기 말 화도진지에 주둔하던 병사와 인근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라고 적혀 있다.
“처음에는 동네를 위해서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 속아서 과연 될까 싶어. 참, 조합에서 뭐가 왔더라고.” 2층에 올라갔던 박희순이 재개발 조합 정기총회 안내문을 들고 내려왔다. 때마침 남편 이보형이 미용실로 들어왔다. 안내문을 쳐다보던 그가 말했다. “또 재개발을 한다고? 천만의 말씀이야.”
/이순민·이창욱·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m
#어떻게 취재했나
21개월간의 현장기록…심층인터뷰·자료 바탕 생생하게 재구성
‘화수화평의 봄여름가을겨울’ 연재 기사는 인천 동구 화수화평 재개발 구역을 1년 9개월 동안 취재한 결과물이다. 조합설립 인가 이후 10년째 지지부진하다가 2019년 시공사 선정을 계기로 재개발에 속도가 붙은 화수화평 구역을 지난해 2월부터 현장 취재했다. 재개발 절차 한복판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주민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동네 변화상을 6회에 걸쳐 풀어놓는다.
인터뷰 대상자는 직접 섭외했다. 지난해 2월19일 첫 번째 인터뷰를 시작으로 계절마다 화수화평 재개발 구역 주민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재개발 진행 과정에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 문제로 이슈 한가운데 있었던 김도진 일꾼교회 목사도 단식농성 이전인 지난해 3월부터 만나 이달까지 9차례 대면 인터뷰했다. 주민뿐 아니라 재개발 조합 관계자, 인천시·동구 공무원, 인천시의원·동구의원, 시민단체 활동가 등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기사에 나오는 대부분의 장면은 취재 과정에서 직접 목격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집회·기자회견 등은 발생 당시 현장 취재했다. 취재 착수 이전의 일이나 현장에 없었던 상황은 회의록·영상·사진 등을 참고했고, 취재원 설명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재개발 조합 정기총회·대의원간담회 등 내부 자료는 취재 과정에서 원본을 입수했다. ‘화수화평 재개발 정비계획’ 변경 과정에서 논란이 불거졌던 도시계획위원회 회의록은 인천시에 정보공개 청구를 해서 확보했다. 2008년 화수화평 정비구역 지정 이후 인천시·인천시의회·동구 행정자료도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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