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다 구전 이야기 각색…삽화 더 해

외가는 읍내서 한참을 가야 했다. 큰 산의 끝자락에 자리한 곳, 바다가 앞에 있어 겨울이면 매섭다. 남쪽나라지만 눈도 많이 왔다. 겨울밤 외사촌 형님, 누이들과 큰솥 걸고 고둥이며 소라, 배꼽조개 등을 삶아 먹었다. 길고 긴 밤, 들었는지 창작인지 분간할 수 없는 괴기스러운 얘기가 오갔다. 이불 속에서 벌벌 떨며 눈만 내밀고 귀를 쫑긋했다.
명희누나가 옆집 숙모한테 들었다며 손짓 발짓을 더 해 도깨비 씨름 이야기를 했다. 한밤중 안골을 걷던 저 마을 아재가 파란 불빛에 홀려 숲길을 헤맸다. 한참을 걷다 한 남자를 만났고, 그는 씨름으로 날 이기면 큰돈을 준다고 내기를 걸었다. 평소 힘이라면 자신 있던 아재가 내기에 응했고, 샅바 싸움부터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먹색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동녘이 빨개질 즈음 안골 삼촌은 한 아름 나무를 부둥켜안고 힘겨루기 중인 아재를 만났다.
도깨비 씨름 이야기는 시골마다 구전된다. 다른 각색으로 재미를 더하지만, 맥락은 대동소이하다.
겨울방학이 지났다. 개학했지만, 다시 봄방학이다.
직장인, 사회인보다 더 바쁜 학생들에게 '책' 읽으라는 조언은 잔소리다. “책에서 길을 찾고 마음의 양식을 쌓으라”는 말은 소귀에 경 읽기다. 거창한 책을 권하기보다, 책과 친해지는 과정이 중요하다.
정세랑 소설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은 그런 책이다. 나온 지 4년 됐고, 80페이지 남짓에 삽화까지 더해져 시간 쪼개 읽기 그만이다. 동화에서 소설로 가는 징검다리 같다. 그렇게 '소설과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열살이 되기 전 이미 60㎏ 넘은 나, 주변사람의 “젖살일 뿐이야, 키가 크려고 그래, 나중에 몰라보게 변할 거야”라는 말에 “거짓말쟁이들이 지겨워서 모른 척 말고 못 본 척을 해 주었으면 했다”는 속내를 보인다. 할머니는 그저 먹는 나를 말리지 않았을 뿐으로, 덩치가 큰 주인공은 학교 씨름부에서 단연 인기다.
변변찮은 성적에 씨름을 내려놓고 아르바이트로 찾은 곳, 홍대 인근에서 가장 큰 건물 '청기와 주유소'다. 주유소 점장님이 나에게 도깨비와의 씨름 내기를 제안한다. 씨름은 시작됐고, 해가 뜨기 직전 음악도 꺼진 홍대의 어스름 속에 도깨비는 신중했다. 도깨비가 중심을 무너뜨렸다. 나는 이미 다 기울어 있었던 허리로, 알고 있긴 했지만 실전에선 한 번도 쓴 적 없는 기술을 썼다. 완배지기다. 결과는 어땠을까. “씨름 선수로서 내 마지막 기술은 아름다웠다. 신경질적으로 아름다웠다.”
커가며 접한 작가와 시간 흐름에 맞춰 그가 펴낸 책을 펼쳐보는 것은 낙이다.
그런 작가가 몇이나 될까. 귀한 곶감 빼먹듯, 편애하는 작가의 책을 책꽂이에서 꺼내보는 짜릿함을 봄방학을 맞으며 느끼길 바란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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