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3년 송의 사신 서긍은 고려를 다녀간 후 '선화봉사고려도경'(이하 고려도경)이란 책을 남겼다. 고려의 정치와 경제, 문화, 역사 등 전반적인 사항을 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송에서 고려까지 오가는 바닷길이 상세히 기록되고 있다. 중국 저장 성 명주(현재의 닝보)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인천 자연도(현재 영종도)를 거쳐 벽란도로 이어지는 해상항로다. 우리의 기록에는 찾을 수 없지만, 고려도경을 통해 송과 활발한 해상교역을 벌인 해상왕국 고려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경원정 위치는
올해는 서긍이 고려를 다녀간 지 9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서남해안 도시 곳곳에서 준비되고 있지만 정작 고대 바닷길의 중심지였던 인천만 조용하다.
이런 가운데 의미 있는 논문 한 편이 발표됐다.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허우범 교수는 국내 해양분야 최고 권위지로 꼽히는 도서문화(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발행) 최신호(제60집)에 '고려도경에 보이는 경원정의 위치 고찰'을 주제로 한 논문을 실었다. 허 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그동안 다양한 이견을 보이던 고려도경에 묘사된 경원정의 위치를 '영종도 중산동 일대'로 새롭게 비정했다.
그동안 경원정 위치를 찾기 위한 여러 노력이 있었다.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는 중국 명대에 발행된 지리책인 '대명일통지'를 인용해 월미도 행궁을 경원정으로 지목했고, 일본강점기 발행(1933년)된 인천부사에는 중산동 구읍 뱃터를 경원정으로 보기도 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공주대 문경호 교수가 비정한 영종도 백운산 동쪽 운남동 일대를 경원정 장소로 보고 있다. 하지만 허 교수가 새로운 자료와 논거로 경원정을 '영종도 중산동 박석공원 일대'로 비정하면서 답보상태였던 경원정 복원의 길도 가능해졌다.
제물포의 시원(始原), 제물사
경원정과 함께 당시 인근에 있었다는 제물사(濟物寺)의 위치도 새롭게 비정될 것으로 보인다. 제물사는 고려의 사신으로 왔다 숨진 송의 사신을 위로하는 사찰로 제물사라는 편액을 당시 고려황제가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는 고려말 목은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 남긴 시에 잘 묘사돼 있다. 그동안 영종도 백운산 북쪽에 있는 용궁사가 제물사로 알려져 왔지만, 경원정이 새롭게 비정되면서 제물사의 위치도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허 교수는 경원정에서 얼마 멀지 않을 곳에 있었던 옛 안양사를 제물사의 유력한 후보지로 꼽고 있다. 박석공원 일대에서 겨우 1.5㎞ 떨어진 곳이다.
인천 역사학계에서 제물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인천의 대표적인 옛 지명인 제물포의 시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제물(濟物)이란 단어의 가장 이른 기록이 바로 고려도경에 묘사된 제물사다. 조선 시대에는 월미도 앞에서 강화도 염하수로 일대를 제물량으로 불렀다. 이를 통해 인천의 옛 이름이 제물포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제물포라는 이름이 최근 또 한 번 부상하고 있다.
제물포 르네상스
인천 원도심 바닷가를 새롭게 만드는 제물포 르네상스가 추진되고 있다. 인천 내항과 중·동구 원도심 일대를 개발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로 유정복 인천시장의 1호 공약이기도 하다. 인천항과 원도심의 문화·관광 자원을 발굴하고, 스마트시티, 도심 항공교통 실증단지 등 청년 일자리도 만들어나간다는 계획이다.
르네상스가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운동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학문과 지식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만큼 제물포 르네상스도 인천이 역사상 가장 큰 도시로 성장했던 고려 시대 인주를 롤모델로, 해상왕국 고려의 중심지였던 강화도와 제물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본다. 특히 르네상스 운동이 문화 역사를 시작으로 정치경제 전반에 파급력을 미쳤듯이 제물포 르네상스도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전면에 내세웠으면 좋겠다.
인천의 내일을 위한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다. 거대한 프로젝트의 그림만 그리다 끝날지, 졸속 추진으로 개발업자만 출연하는 막장드라마로 변질할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원도심의 자산을 앞세워 글로벌 명품해양도시로 성공할지 모두 시민의 선택과 관심에 달렸다.
/남창섭 기획실장 겸 정치2부장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