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7일 '대중일보' 창간
송수안 매일신보 인천지국장 주도
1973년 '1도1사' 정책 언론 통폐합
現 경인일보 1사 체제, 15년간 유지
1987년 6월 항쟁 성과 '언론 자유'
경인일보 인천 주주들 새신문 제안
인천신문, 민주화 후 전국 첫 창간
닷새 뒤 7월20일 기호일보도 탄생

1988년 7월 15일 인천신문(현 인천일보)이 창간했다. 닷새 뒤인 7월 20일에는 기호일보가 창간했다. 인천을 본사 소재지로 하는 지역 신문이 15년 만에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인천언론사>는 당시 인천신문 창간을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후 전국 첫 창간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인천에서는 1973년 이후 15년을 지역 신문으로는 수원에 본사를 둔 경인일보가 유일한 보도 매체였다. 한 지역에 한 개의 신문만을 둔다는 속칭 '1도1사 정책' 때문이었다. 6월 항쟁의 결과물인 언론 자유화 이후 인천신문 창간은 타 지역에 비해 빠르게 이루어진 거였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당시 경인일보가 본사는 수원에 있으면서도 윤전기가 있는 별도의 인쇄공장을 인천에 두고 있었는데 경인일보의 인천 출신 주주들이 새로운 인천신문으로 옮기면서 윤전기를 넘겨받아 곧바로 가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천언론사>는 인천신문 창간을 다루면서 경인일보의 주주가 어떻게 인천신문 주주로 이동했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1987년 10월 14일 경인일보사 임시 주주총회에서 인천 지역 주주들이 인천 지역에 새로운 신문사 설립 제안이 있었고 그해 11월 19일 인천 지역 법인을 포함한 15명의 주주들이 인천신문사 발기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합의했다. 자본금 7억5천6백53만원으로 확정했다. 경인일보는 3사 통합으로 새로 출범한 경기신문이 1982년 3월 1일 제호를 바꾼 신문으로 경기신문 출범 때 인천 지역 유지들과 법인 등 15명의 주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신문사는 수원에 있었지만 인천 주주들의 지분이 58% 대 42%로 더 많았었다.”
인천은 항구도시여서 문물이 자유롭게 오가는 곳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자연스럽게 언로도 활발히 트이는 법. 1973년 언론 강제 통폐합 조치 이전까지만 해도 인천에는 언론사가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게 경기매일신문, 연합신문, 경기일보 등이었다. 이 셋 중 연합신문은 통폐합 직전인 1969년 본사를 수원으로 이전했다. 1973년 기준으로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사는 경기매일과 경기일보 두 곳이었다.

1973년 언론 통폐합은 인천 언론의 입장에서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가장 규모가 크고 언론사 창간 시점도 가장 오래된 곳이 경기매일신문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 유치전을 벌이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천과 수원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인천이 패했다는 시각이 많았다.
1960~80년대 군부독재로 암울했던 시절, 정부의 언론 통제 정책은 여러 차례 있었다. 1961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11호에 따라 전국 지역 일간지 27개가 폐간되었다. 24개만이 살아남았다. 자유당 정권과 4·19 뒤 개방된 언론 자유 속에 범람한 신문통신사를 정비하고, 사이비 기자를 근절한다는 명목의 통제였다. 당시 경기도내에서 발행이 허가된 신문은 경기매일신문, 인천신문, 경인일보 등 3개사였다.
이들의 연혁을 보면, 경기매일은 1960년 7월 창간했는데, 1945년 10월 7일 창간한 대중일보의 계보를 잇고 있었다. 인천신문은 1960년 8월 15일 창간했는데 1969년 4월에 본사를 수원으로 옮기고 이듬해인 1970년 10월 연합신문으로 이름을 고친다. 경인일보는 1951년 인천일보로 창간한 뒤 1955년 제호를 경인일보로 바꾸었는데 1962년 경기매일에 흡수된다. 이때도 정부의 강압이었다. 이렇게 해서 경기도내에는 지역 신문이 2개만 남아 있었는데 1966년 2월에 인천에서 경기일보가 창간했다. 한동안은 이렇게 3사 체제가 정립되는 듯했다.
또 한 번의 언론 통폐합 조치가 내려졌다. 1973년 8월 31일 자로 경기매일신문, 연합신문, 경기일보가 폐간하고 이들 셋이 경기신문을 만들어 9월 1일 자 첫 호를 낸다는 거였다. 실제로는 연합신문이 경기매일과 경기일보를 흡수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니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던 두 곳의 신문은 문을 닫고 수원에 본사를 둔 신문사만 남게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강제로 폐간해야 하는 신문사들의 8월 신문은 비장했다. 경기매일신문은 8월 10일 자를 '지령 9천호 특집'으로 꾸몄다. 이날 1면에 배치한 사설 제목은 '애환 얼룩진 금자탑'이었다. 경기일보 종간호 1면 '만년필'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독자의 가려운 곳을 시원스럽게 긁어드릴 수 있을까 이모저모로 만년필을 입에 물고 이 궁리, 저 궁리해보던 나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추억의 장으로 넘어간다”고 썼다.
이들 인천에 본사를 둔 2곳의 신문사는 문을 닫으면서까지도 1973년 9월 30일에 나온 『인천시사』 상·하권을 편집 제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두 신문사가 8월 31일 자로 종간호를 찍었으니 작업 막판에는 오히려 폐간으로 인해 큰 애로를 겪었다고 한다.
1973년, 이때부터 경인 지역 일간신문 독점 체제가 시작되었다. 1988년 인천신문과 기호일보가 창간할 때까지 15년간이다. 3사 통합으로 생겨난 경기신문은 1981년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된 직후인 1982년 3월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신문과 기호일보 창간 1개월여 뒤인 1988년 8월에 경기일보가 창간했고, 1991년 2월에는 중부일보가 창간했다. 이들 다섯 곳 신문사 모두 경기도와 인천광역시를 주요 취재 보도 권역으로 삼고 있다. 경인, 인천, 기호, 경기, 중부 중 인천과 기호만이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고, 나머지 세 곳은 수원이 본사이다.
인천 언론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해방 직후 창간한 대중일보를 빼놓을 수는 없다. 해방 이후 2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945년 10월 7일 인천에서 대중일보가 창간했다. 제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개항장 인천은 일본인들이 주를 이루었고, 그들의 신문들로 인한 언론 인프라가 잘 짜여 있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곧바로 대중일보가 창간할 수 있었다.
1944년 매일신보 인천지국장을 맡으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은 송수안이 대중일보 창간을 주도했다. 사장은 외과 의사이자 문화사업에 관심이 많던 고주철이었다. 편집국 기자로는 엄흥섭, 김도인, 진종혁, 김차영 등 당대 이름 높던 문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당시 전국에서 잇따라 생기던 언론사 중에서 가장 탄탄한 진용이란 평가를 받았다. 논조는 초창기에 진보 성향을 유지하다가 차츰 보수 쪽으로 기울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로 잠시 발행을 중단했다가 9월에 송수안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이름을 인천신보로 바꾸어 발행을 이어갔다. 1959년 7월에 기호일보로 고쳤다가 1960년 7월에 경기매일신문으로 바꾸었다. 이 경기매일신문이 그 13년 뒤인 1973년 8월 31일 종간호를 내고, 9월 1일부터 경기신문으로 강제 통합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천, 경기 지역에서는 이때부터 15년 동안 경기신문(현 경인일보) 1사 체제가 유지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 언론 자유를 쟁취, 1988년 이후 여러 언론사가 새로 창간되었다.
/인천생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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