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이 살길, 멸사봉공 정신
▲ 50년이 넘는 세월을 해양과 물류에 몸담아온 이승민 전 인천항만물류협회 회장. 숨 가빴던 인천항의 성장과 궤를 함께 해온 그는 '물류 전문경영인'으로서 인천항 역사에 한 획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의사인 아버지 반대에도 해양대 진학
졸업 후 한진해운 전신 해운공사에 이어
동부건설·고속 등 거쳐 물류전문가 길로

한국에선 '물류'단어조차 낯설던 80년대
매뉴얼 없어 일 터질 때마다 노트에 메모
100페이지 가까운 정리본 교과서 자료로

IMF 위기땐 부두 전용운영권 TOC 도입
전문성 갖춰지자 오히려 투자 들어와
10년 주기 세계경제 위기 인천 예외 없어
그때마다 지역·나라 생각하면 돌파 가능

"인천에, 나라에 무엇이 도움이 될까?"

㈜선광 고문으로 일선에서 물러난지 100여일이 지났다.

인천에서 태어나 국립해양대학교 진학으로 해양과 필연적 인연을 맺은 이승민 전 인천항만물류협회 회장은 50년이 넘는 세월을 해양과 물류에 몸담았다.

숨가빴던 인천항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해온 그는 '물류 전문경영인'으로 인천항 역사에 한 획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일 아침 바닷바람을 맞으며 항동으로 출근하던 그는 요즘 학익동에 둥지를 틀고 인천항 역사를 가다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운명처럼 다가온 해양과의 만남

해양과의 만남은 숙명이었을까. 제물포고교를 졸업하면서 그의 선택은 '해양대'였다. 담임교사가 찾아오고 부모도 말렸지만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이승민 전 회장은 "도서관에서 해양대 팜플렛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사실은 부친께서 의사셨는데, 자주 찾아오셨던 친구분들이 도선사셨다. 그분들 영향이 더 컸다"고 말했다.

파일럿(pilot)하면 대부분 비행기 조종사를 얘기하지만 항만판에서는 도선사로 알아 듣는다.

'파이로뜨'는 한국고용정보원 조사 연봉 1위, 직업만족도 조사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최고의 선망직업이다.

1960년대 후반 인천항에는 6명의 도선사가 있었다. 친구 도선사들의 강권으로 아버지는 해양대 진학을 허락했다. 운명처럼 이 회장의 진로는 해양대로 결정됐다.

그는 "실습사관으로 태평양을 건너 파나마운하를 향하던 1969년으로 기억되는데, 갑판원으로 일하던 이가 바다에 떨어져 상어 천지에서 거북이 등을 타고 살아난 사건, 미국에서는 영화같은 일이라고 언론에 대서특필됐던 일이었는데, 그 이와 같은 배를 탔던 인연도 있고"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던 거북이 등 생환자는 현재 부산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등, 1등 항해사를 거쳐 선장면허를 취득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이 회장은 '마도로스'의 꿈을 접고 '육상'근무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1973년 대한해운공사(한진해운 전신)를 시작으로 동부건설 독일 주재원, 동부고속 물류사업부를 거치면서 하역, 물류와 인연을 맺게 된다. 과정에는 우연이라는 외피를 쓴 '운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전 회장은 "1973년 해군 제대 이후 다시 배를 타야 했는데, 어떤 인연이었는지, 육상근무를 하게 됐다.
당시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화물선을 몰아 본 경험이 컸던 것 같다"며 "범양상선(현재 팬오션)으로 자리를 옮길 때도, 미륭건설(동부건설)로 자리를 옮겨 독일 주재원으로 생활할 때도, 나중에는 동부고속에 물류사업부로 자리를 옮길 때도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 했다"고 말했다.

화물감독을 하는 운항과장으로 첫 육상근무를 했고 중동 건설붐 시절에는 유럽의 자재를 중동으로 수송하는 총괄 책임자를 맡은 뒤 물류사업부에서 하역담당으로 '물류 전문가'로의 경력을 쌓아 갔다.

4년간 동부건설 독일 주재원 시절에는 중동이 이슬람율법상 금요일이 안식일이었던 관계로 주말을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을 정도로 일만 했다.

물류(Logistics)라는 단어가 수송(Transpotation)을 대신하기 시작한 초창기 시절이었다. 메뉴얼이 있을 리 없었고 일일히 상황마다 대처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나날이었다.

그는 "하나하나 메모하고, 옮겨 적고, 이를 다시 노트로 꼼꼼히 정리해 보니 100페이지 가까이 되더라. 정리본은 나중에 한국에 귀국한 뒤 물류학 교과서의 소스가 됐다. 한국에서는 물류라는 단어도 없던 80년대 초·중반 시절이었지"라고 말했다.

▲인천항 10년 주기설

38살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동부고속 물류사업부 인천지점장으로 인천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자기 보다 10~20살 많은 직원들을 이끌어야 했다. 벽을 깨기 위해 술도 죽기살기로 마셨고 일도 죽기로 했다.

물류 전문가로 서서히 이름을 알렸고 운명처럼 인천항사에 기록될 여러 일들이 그 앞에 놓여지기 시작했다.

인천항 10년 주기설, 이승민 회장이 인천항과 함께 한 33년중 손에 꼽는 사건들이 있다. 인천항뿐 아니라 대한민국 항만사를 새로 쓴 격동의 현장에 그가 있었다.

동부건설 인천지점장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던 그에게도 IMF는 큰 산이었으며 도전이었다. 급격한 환율변동으로 하역업체들은 적자가 쌓여 갔고 물동량 감소로 목숨줄이 간당간당하던 상황이었다.

'TOC'(Terminal Operation Company), 일정한 부두에 대한 전용운영권을 지니고 그 시설에 대한 운영을 담당하는 회사를 말한다.

물량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하역하던 시절에서 전문성을 갖고 하나의 부두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운영하는 체제를 말한다.

TOC 도입 이후 시설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면서 업무효율도 극대화 됐다. 인천내항 40개선석에 12~13개 선석이 새로 생긴 효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인천항 위기 극복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2007년 항운노조 상용화, 2018년 인천내항 통합 TOC 설립 등의 현장에 그가 있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인천항만물류협회 회장으로, 이후 인천항만공사 항만위원으로 합리적 대안 도출과 협의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전 회장은 "어느 것 하나 쉬운 사안이 없었다. 1997년 IMF 이후 10년 주기로 세계경기가 급락하면서 그 파고가 인천항에도 밀려왔다. 서로 내 것을 내려놓고 남의 것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잘했다기 보다는 더 얘기하자고, 솔직해지자고, 우리 다 죽을 수 있다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것이 오늘날 인천항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된 것 같다. 다들 고생했지"라고 말을 아꼈다.

이어 "과정에서 속상하고 본의아니게 상처주었던 일들도 많았다. 위기의 순간마다 '뭐가 인천에 도움이 될까? 나라에 도움이 되는 건 뭘까?'를 되뇌었다. 결심이 서면 바로 실행했다. 내 사익이 아니라, 우리 회사의 이익이 아니라 인천항의 이익,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일하다 보니 그래도 전문경영인 소리 듣고, 전문가 소리 듣는 것 같다"고 말했다.

▲외항시대, 이제 힘 모을 때

이 전 회장은 인천항 3대 사건에 외항시대 개막을 인천항 최대 변곡점으로 꼽았다.

그는 인천남항에 이은 인천신항 개장으로 명실상부 인천항이 300만TEU 시대를 넘어 400만, 500만TEU 시대, 세계 30위권 항만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전환점이라 설명했다.

지역현안이었던 16m 준설을 이끈 숨은 주인공도 이 전 회장이었다.

인천대교 주경관폭 800m를 이끌었던 주역들과 함께 본격적 외항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1만TEU급 대형선박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제대로된 항구와 항로를 만들겠다는 치밀한 전략이 인천신항의 성공적 개장과 안착을 이끌었다.

그가 몸담았던 선광이 인천신항 부두운영사로 정해진 상황도 아니었다.

이 전 회장은 "선광 심충식 부회장과 머리를 맞대고 외항시대를 고민할 때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저는 무언가를 결정할 때 '나라에 무엇이 도움이 될까'를 고민합니다'라고 말하더라고. 아,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이렇게 나 보다, 내 회사보다 지역과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구나, 멸사봉공(滅私奉公)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어. 그래서 지역사회와 힘을 모아서 인천항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항, 현안 참 많다. 멸사봉공, 지역사회와 함께, 공직자부터 공공기관까지 지역과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인천이 살고 인천항이 산다. 기업인들도 항만 관계자들도 명심해야 한다. 스스로 돌아보고 함께 의논하고 치밀한 전략을 세워 꿋꿋하게 실행해 가야 한다. 그래야 인천항이 살고 인천이 산다. 잔소리로 들릴까?"그가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김칭우 기자 chingw@incheonilbo.com